[한마당-성기철] 18년 된 ‘소떼 트럭’

입력 2016-01-22 17:42

1998년 6월 16일 오전 9시 판문점. 한반도 분단 현장에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됐다. 83세 고령이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500마리를 실은 5t 트럭 50대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어서다. 충남 서산농장에서 애지중지 키워온 소를 북에 제공하기 위해 새벽부터 싣고 온 것이다. 정 회장은 “나의 방북이 남북 간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내 방송사들은 ‘카우보이 작전’이라 명명된 이 소떼 방북 행사를 공중촬영까지 해가며 생중계했으며, 미국 CNN 방송은 “드디어 휴전선이 열렸다”고 보도했다. 문명비평가 기소르망은 이 모습에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란 평가를 남겼다.

정 회장은 북의 요청에 따라 그해 10월 27일 2차 방북을 하며 소 501마리를 더 싣고 갔다. 트럭도 모두 북에 넘겨줬다. 소 값으로 18억원, 트럭 및 사료 값으로 42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정 회장이 직접 기획하고 연출한 두 차례 드라마는 갓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햇볕정책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2차 방북 때 평양 백화원초대소로 정 회장을 찾아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한과의 경협 확대를 강력히 희망했고, 이는 곧바로 김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금강산관광길은 한 달 뒤 그렇게 해서 열렸다. 뒤이은 남북정상회담과 개성공단 건설도 소떼 방북이 기초를 닦았다고 볼 수 있다.

소를 싣고 간 트럭 100여대가 아직 북한 전역에서 운행 중이라고 자유아시아방송(RFA)이 보도했다. ‘현대자동차’와 ‘대한적십자사’ 마크를 떼어낸 채 여러 기업소에 배치돼 18년째 굴러다닌다는 얘기다. 그동안 북한에선 3대 세습이 이뤄졌고, 남한에선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안타깝게도 남북관계는 당시에 비해 크게 후퇴했다. 금강산관광은 8년 가까이 중단돼 있고, 소떼 트럭이 지나간 판문점에는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돌고 있다. 우리 군의 대북방송과 북한의 대남전단 살포가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제2의 정주영’이 나타나 소떼 방북 퍼포먼스를 한 번 더 해야 남북관계가 풀릴 것인가.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