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 ‘3저 호황’] GDP 12%·주가 73%↑… 88년 한국은 팔팔했다

입력 2016-01-23 04:05
올림픽 성공적 개최를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발행됐던 올림픽복권. 초기에는 성화봉송 모습의 디자인이 주를 이뤘다. KB국민은행 제공
80년대 고금리로 인기를 끈 각종 예금통장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한일은행의 세금우대종합통장. 우리은행 제공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에는 당시의 경제상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감칠 맛 나게 소개됐다. 한때 최고의 직장으로 꼽혔던 한일은행, 연 17%짜리 고금리 은행상품, 올림픽복권 인기, 주식 열풍 등의 모습은 요즘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면서 당시 풍요로운 서민경제의 일단을 보여준다. 1988년 전후 우리 경제의 단편적 모습을 요즘과 비교해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될 듯하다.

◇성동일 과장이 몸담은 한일은행의 위상=성동일은 30년 가까이 한일은행에 몸 바쳐 일하다 명예퇴직당한다. 드라마에서 라미란이 명예퇴직한 성동일에게 “나 이제 한일은행 통장 없앨 거야. 덕선이 아빠도 안 다니는데 왜 가지고 있어”라고 위로한 것을 보면 이웃 대부분이 한일은행 고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일은행은 우리나라 최고의 시중은행으로 꼽힌다. 전국은행연합회가 발간하는 ‘금융’지 88년 2월호를 보면 한일은행은 전년도에 국내 은행 중 성장률 1위를 차지했다. 당시 박명규 한일은행장이 이 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올해 내실 있는 은행 경영을 통한 이익 극대화와 영업 전 부문에서의 우위확보 유지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1990년 한일은행에 입행한 현직 모 은행 부장 A씨는 “당시 가장 잘나가던 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 등 5개 은행에 합격했는데 주변에서 다들 한일은행으로 가라고 권유했다”며 “첫 출근했을 때 시중은행 1위를 차지했다는 플래카드가 건물에 걸린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70년대 말 한일은행에 입행한 우리은행 임원 B씨는 “80년대에 유수의 대기업들을 고객으로 많이 상대하면서 위상이 남달랐고 대우 또한 다른 금융사들보다 좋았다”고 회고했다.

응팔을 본 한일은행 출신들의 감회는 남다르다. A씨는 “해외에 있는 한일은행 출신 인사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오랜만에 많은 연락을 해와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고 말했다. 다만 이들은 극 중 성 과장에 대해 아쉬운 점 한 가지를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바로 외형이다. A씨와 B씨는 “성 과장의 외모나 옷차림이 너무 초라했다”고 입을 모았다. B씨는 “당시 한일은행맨들은 대기업을 상대하는 입장이어서 외모나 옷차림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며 “성동일은 대리를 오래했다고 나오는데 당시 대리는 기관장을 대신해 자기앞수표에 서명할 수 있는 전결 권한도 갖고 있어 당당했다”고 말했다. 물론 서민층을 강조하자는 차원이었겠지만 성동일의 모습은 그 시대 한일은행맨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옥에 티 같은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막강한 위상을 보여줬던 한일은행이었지만 97년 외환위기의 파고는 넘지 못했다. 많은 대기업들이 외환위기 때 쓰러져 나가자 대기업을 주로 상대한 한일은행도 직격탄을 맞게 된 것이다. 99년 한일은행은 상업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이 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빛은행은 다시 평화은행과 합치면서 2002년 5월 우리은행으로 행명이 바뀐 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올림픽복권 인기=응팔에서 정봉이는 비록 대입 7수생이지만 집안에 행운을 몰고 오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가 가져온 첫 행운은 올림픽복권 당첨이다. 당시 동룡이 집 단칸방에서 살던 정봉이 가족은 정봉이가 구입한 올림픽복권이 1등(상금 1억원)에 당첨되면서 좋은 집으로 이사 가는 등 인생역전에 성공한다.

한국주택은행(현 KB국민은행)은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수행을 위한 자금 마련을 명분으로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와 83년 2월 올림픽복권 발행업무 대행계약을 체결했으며 그해 4월 1일부터 올림픽복권을 발행했다.

당시 은행 쪽 사료를 보면 올림픽복권의 인기는 대단했다. 1회 올림픽복권 가격은 1장에 500원으로 총 10억원어치(200만장)가 발행됐다. 그러나 올림픽에 대한 관심과 1등 1억원이라는 고액당첨금에 대한 기대 심리로 발행 초기에는 발매 후 1∼2일 만에 매진됐다. 수요가 폭발하자 9회부터는 주당 12억5000만원(250만장), 23회부터는 15억원(300만장)으로 증액됐다.

복권이 인기를 얻으면서 주택은행은 올림픽복권 정기수집자나 구매자를 위한 사은행사도 종종 열었다. 신년 및 복권 발매 5주년에 사은행사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상품 내역은 1등이 승용차, 2등은 VTR, 3등은 냉장고 혹은 TV였다.

올림픽복권 디자인도 회를 거듭할수록 다양해지고 화려해졌다. 1∼4회는 올림픽성화 채화장면을 실었고 5∼52회는 고대·근대 올림픽 경기를 새겼다. 1985년 정봉이가 1등에 당첨된 110회 올림픽복권은 한국의 민속놀이 ‘좌수영 어방놀이’가 디자인됐다. 올림픽복권은 올림픽이 끝난 뒤인 88년 12월 299회로 종료됐다. 마지막 복권에는 서울올림픽 폐막식 전경이 담겨 있어 유종의 미를 부각시켰다.

정봉이가 당첨된 1억원의 시세는 어느 정도일까. 부동산을 기준으로 할 경우 1988년 12월 말 당시 은마아파트 34평(112㎡)의 매매가가 6500만∼7000만원 정도였다. 현재는 11억원 수준으로 약 17배 이상 가격이 뛴 것이다. 이를 대입하면 당시 상금 1억원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금리 17% 은행상품과 주식 열풍=성동일은 89년 초 주식열풍이 불 때 여윳돈을 어디다 투자해야 할지를 묻는 최무성(택이 아빠)에게 “주식은 이제 끝나부렀다. 금리 17% 하는 예금상품에 넣으라”고 조언한다. 현재 예금금리가 고작 1∼2% 정도인 요즘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실제 당시 은행 예금금리는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한국은행 경제통계연보를 보면 1988∼89년 은행 정기예금 금리는 10.0%였다. 금리자유화가 막 시작된 시점이었지만 이 수준은 대부분 은행이 동일했다. 다만 개개 상품별로 보면 이를 웃돌기도 했다고 한다. 모 은행 관계자는 “예금상품이 12%대도 있었고 당시 개발신탁이나 적립식 목적신탁 등의 금리는 13.5% 정도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실제 17% 예금상품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당시 은행에 1억∼2억원을 넣어두면 이자로 먹고 산다는 얘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금리가 높다보니 88년 가계저축률은 24.7%로 아직까지 사상 최고 수준으로 남아 있다.

이듬해인 1989년 3월 31일 우리나라 주가는 사상 처음 1000선을 돌파한다. 응팔에서도 이 장면이 나온다. 허리가 부러져 입원해 있던 김성균은 주가 1000 돌파를 소개하는 TV 뉴스를 보면서 병문안 온 성동일과 최무성에게 “친구가 그러는데 삼성전자 한미약품 태평양화학은 꼭 사라고 하더라”고 말한다.

거래소에 따르면 89년 주식시장 개장일(1월 4일) 종가로 삼성전자는 3만6400원, 한미약품공업은 1만5800원, 태평양화학은 2만300원이었다. 삼성전자는 22일 현재 116만8000원으로 32배 이상 뛰었다. 다른 종목들은 그동안 액면분할, 인적분할, 지주사 설립 등을 거친 터여서 당시 주가와 지금을 똑같이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단순 수치로만 보면 현재 한미약품은 72만3000원, 아모레퍼시픽(구 태평양화학)은 39만2500원(22일 종가 기준)으로 각각 약 46배, 19배 급등했다.

드라마 속 병실에서도 화제가 될 정도로 88∼89년은 전 사회적으로 주식열풍이 불어닥친 시기였다. 1987년 말 국내 증시는 종합주가지수 525.11로 장을 마감했는데 그 후 1년 동안 72.8% 급등하며 88년 말에는 907.20으로 폐장했다. 88년 4월 포항제철(현 포스코)이 국민주 1호로 상장돼 일반 국민의 주식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고세욱 기자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