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과 희망의 메시지-박종화 목사에게 듣다] “화음이 있는 사회야말로 선진 사회다”

입력 2016-01-21 21:30 수정 2016-01-22 18:03
박종화 경동교회 원로목사는 20일 “망(網)으로 엮인 시대에 각자 부여된 악기(달란트)를 불어서 화음을 만들어낼 때 상상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며 “화음을 만드는 사회가 아름답다”고 강조했다. 강민석 선임기자
박종화 경동교회 원로목사(왼쪽)가 20일 연규홍 한신대 신학대학원장과 대담을 나누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새해 들어 북한의 ‘수소탄 실험’과 중국 경제의 침체, 자녀학대 등 우울한 뉴스들이 잇따라 들려오고 있다. 청년 실업과 저출산·고령화 등 오랜 난제들도 개선될 조짐이 없다. 국민일보는 20일 한국교회의 대표적 지성인 박종화 경동교회 원로목사와 대담을 갖고 위기와 절망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공존과 희망의 메시지를 들었다. 대담은 연규홍 한신대 신학대학원장이 진행했다. 박 원로목사는 16년간 기독지성인들의 산실로 불리는 경동교회를 ‘화(和)의 신학과 목회’로 섬기고 은퇴했다. 대담은 자연스럽게 은퇴에 대한 소회를 듣는 것으로 시작했다.

특별 대담=연규홍 한신대 신학대학원장

-지난해 12월 27일 경동교회에서 은퇴한 소감부터 말해 달라.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프리덤 프롬(Freedom from,∼로부터의 자유)’과 ‘프리덤 투(Freedom to, ∼을 향한 자유)’에 빗대고 싶다. 나의 은퇴는 경동교회 목회로부터의 해방이다. 동시에 교회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삶의 영역으로 뛰어들어 기독교적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헌신할 수 있는 자유이기도 하다.”

-입장이 제사장에서 예언자로 바뀌었다. 한국사회를 위해 어떤 예언자적 역할을 할 것인가.

“지금 필요한 예언자적 역할은 대안을 세우는 활동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결국 통일이다. 한 나라가 끝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는 왕조사, 국가사처럼 통일을 인식하는 건 잘못이다. 바로 지금 함께 사는 과정 하나하나가 통일의 한 장이다. 하나의 나라가 되는 건 형식적 완성이다. 이에 앞서 사회적 통합, 정신사적 합일에 중점을 두고 통일 논의를 해 나가려 한다.”

-분단 이후 교회가 남북을 공존적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듣는다. 한국교회 안의 반공 논리, 반북 논리가 우리의 삶을 내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 잘 믿으니 남한만 구원받고 북한은 심판받을 것이라는 태도는 성경의 관점에서 어긋난다. 신학의 관점은 ‘내가 하나님 편이다’이지, ‘하나님이 내 편이다’가 아니다. 진실로 내가 하나님의 편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인지 진보와 보수 모두 솔직하게 반성해 봤으면 좋겠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원수를 두면 내 삶의 주인이 원수가 된다. 원수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삶이 바뀌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건 똑같이 원수로 여기지 말고 사랑으로 이겨내라는 것이다.”

-5만여 한국교회가 남북 화해에 앞장서기 위해선 적대감을 극복해야 한다. 평화신학, 평화목회를 해온 입장에서 조언을 해 달라.

“안보는 필요하다. 상대방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안보를 하는 게 맞다. 일각에선 핵무기 갖는 걸 안보라고 생각하는데 난 달리 본다. ‘인간안보’가 핵심이다. 전쟁을 못하게 만드는 평화 정신이 곧 인간안보다. 북한 사람들이 ‘왜 남조선은 우리가 핵무기 가졌다는데 벌벌 떨지 않는가’라고 묻더라. 일본 나가사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핵무기는 단 한 번도 쓰인 적이 없고 쓰일 수도 없는 무기가 됐다. 쓰면 공멸인데 그러고 싶은 지도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그래서 더는 협박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핵 협박’이 안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게 평화다. 핵무장을 하는 게 아니라 핵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어야 한다.”

-핵무기를 무력화하는 평화적 신앙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정보와 기술이 얼마나 발전하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느냐고 하는데 사람의 마인드가 기술을 지배하지 기술이 마인드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생명을 중시하지 않는 사회는 실패한다. 단순히 내가 태어났다 죽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내 안에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자꾸 안보·이념·기술·물질과 같은 형이하학적 가치에 묶이는 모습이 안타깝다.”

-통일 시대를 대비하는 데 필요한 리더십은.

“과거에는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지도자들이 나를 따르라고 하면 따라갔다. 반대로 바닥에서 조직해서 위로 치고 올라가는 ‘보텀-업(bottom-up)’ 방식도 있었다. 산업화·민주화시대까지는 통했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각 주체가 선을 따라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게 아니라 서로 연결해서 ‘망의 공동체’를 이룬 세상이 됐다. 서로 연결돼 있어서 망 하나가 망가지면 다 망가진다. 그 속에서 개인들은 완벽하진 않지만 저마다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 오케스트라에 비유해보면 개인은 악기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양한 달란트를 받았다. 각자 자기 소리를 내는 건 솔로로 하고, 함께할 때는 화음을 내야 한다. 다양성 속에서의 합일이 화음이다. 그래서 망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철학은 화합이고 평화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 필요하다. 화음이 있는 사회야말로 선진 사회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화(和)’가 부족한 것이 문제다.”

-‘화(和)의 신학’을 통일 문제에 적용해본다면.

“남북이 70년간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절대로 ‘동(同)’ 즉, 같을 수는 없다. 같은 민족이란 것을 빼면 사고방식부터 모든 게 다 다르다. 정치는 적대관계에 있더라도 사회·문화·예술 중 ‘화(和)’할 수 있는 것이 많다. 남과 북이 함께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고전을 발굴할 수도 있다. 정부는 갈등관계에 있어도 경상북도와 함경북도는 지방 차원에서 화해할 수 있다. 이렇게 ‘화(和)’를 시작하는 게 평화적 공존이다. 이념적 틀 하나로 모든 걸 평가하지 말자. 독일에서는 정치가 매섭게 대립해도 예술·문화·교회에서는 화해하더라. 그러면서 정치도 이념도 유연해졌다. 원수에 매이는 게 아니라 원수 됨을 푸는 지혜를 발휘하는 게 선진 사회다. 독일은 정치·사회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절대 다수당을 두지 않는 정치제도 속에서 당끼리 화합하는 연정이나 정책연합으로 사회 문제를 풀어나간다. 노와 사도 같지 않지만 타협해나가며 답을 찾더라.”

-화합, 타협과 조정, 연대와 같은 가치들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정치적 타협을 나쁘게 보는 데 절대 그렇지 않다. 독일의 경우 각자 다른 건 알아서 하되, 통일과 같이 정파를 초월한 문제는 파당적으로 하지 말자고 합의하고 그렇게 해 나간다.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도 공동으로 ‘화(和)’할 수 있는 것만 화합하고 나머지 서로 다른 것은 그대로 내버려둔다. 한국에서는 그걸 정죄하는데 어리석은 짓이다. 상대적 진실, 상대적 선을 추구하는 게 바람직한데 우리는 스스로가 상대적인 줄 알면서도 항상 절대화하는 우를 저지른다.”

-한국사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상황에서 대학 강의와 교육 패턴을 미래 지향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19세기 교수들이 20세기 교실에서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말이 있지 않나.

“처음부터 ‘화(和)’를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과 죽으라고 내 악기만 연주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공부하는 것은 다르다. 때로는 솔로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오케스트라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목회를 하면서 설교 한 편 준비하기 위해 1주일 내내 공부하고 생각했다. 대학에 다닐 때 내게 생각을 많이 하도록 공부시킨 과목이 없었다. 현재 한국의 대학 교육은 사고 훈련은 안 시키고 지식 습득만 시킨다. 지식 축적은 가능하지만 지혜의 발굴은 어렵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하나님만 할 수 있다. 우리는 유, 흐트러진 단자를 각자 콘덴서로 모아서 창조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런 사고의 훈련, 융합하기 위한 노력은 언제부터 하게 됐나.

“한신대 1학년 때 김재준 목사님의 기독교개론 수업을 들었다. 숲에서 왔다 갔다 하며 길을 잃지 말고 봉우리에 오르라고 하셨다. 한 봉우리에 올라가면 다른 봉우리가 보인다고. 봉우리에 오르지 못하면서 이리저리 다니는 건 혼합, 잡탕에 불과하다. 한 봉우리에 올라가서 다른 봉우리를 보면서 숲을 보는 것, 그리고 그걸 연결해 내는 것이 통섭과 융합이다. 한국교회가 먼저 한국의 봉우리를 세우고 거기까지 올라갈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 모든 세계교회가 한국교회의 애타는 가슴, 영성 등을 강조하고 있다. 밖에서도 그걸 봉우리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독백성 신학이 아니라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신학을 내놔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제는 복음을 발신하는 복음강국으로 가야 한다는 지적에 동감한다. 저마다의 봉우리를 연결하는 하모니의 복음, ‘화(和)’의 복음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각자의 특성을 보고 배려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평생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내가 설교 한 편 했을 때 그날 설교가 나 자신을 감동하게 했는지 아닌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나를 감동시키지 못한 설교는 남도 감동시키지 못한다. 자기 사랑도 못하면서 이웃 사랑한다고 떠벌리고 다니거나 자기 사랑에만 머무르지 말길 바란다.”

-언론 역시 매우 중요하다. 국민일보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진보에선 시시하다고 하고, 보수에선 조금만 다르게 써도 좌로 간다고 비판한다. 국민일보는 좌와 우 가운데의 중립이 아니라 중심에 서야 한다. 핵심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을 것이라고 믿고 쓴다면 성령이 교통시켜 주실 것이다. 국민일보는 ‘예수 정론’을 펴야 한다. 기자들 스스로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정론을 펴겠다’고 생각하면 글이 달라질 것이다. 독자들이 글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진실로 기독교적인 가치와 사상을 추구한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신문을 살릴 것이다.”

정리=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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