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힘’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가 지난해 강연과 서평을 통해 추천하면서 알려졌다. 2014년 미국에서 ‘How Asia Works(아시아는 어떻게 움직이는가)’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자선재단을 운영하는 게이츠는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빠른 경제성장을 이끈 요소들을 훌륭하게 조명한다”고 이 책을 평가했다.
저자 조 스터드웰은 20여년 경력의 저널리스트로 중국과 아시아 경제 전문가다. 중국 증시의 문제를 파헤친 ‘차이나 드림’, 베일에 싸인 아시아 정·재계 거물들을 다룬 ‘아시아의 대부들’ 등의 책을 썼다. 이번 책에서는 2차대전이 끝난 후 일제히 전개된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개발 역사를 살펴보면서 일본, 한국, 대만, 중국은 어떻게 고도성장을 이뤘고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등 나머지 국가들은 왜 실패했는지 분석한다.
동아시아의 개발사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른 결정적 요소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개발경제학의 오랜 주제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명쾌한 답변을 제시한다. 경제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역할이며 산업정책에서 핵심은 토지개혁을 통한 농업 개발, 수출 중심 제조업 육성, 금융에 대한 통제 등 세 가지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경제개발에 성공한 일본과 그 뒤를 따라간 한국·대만, 그리고 그들보다 한참 늦게 출발한 중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성공의 공식이다. 소작농 위주였던 농업을 토지개혁을 통해 소규모 가족농으로 재편하는 것은 한 국가가 산업화를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돼 준다. 농업 부문에서 형성된 부는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댈 뿐만 아니라 초기 제조업체들의 시장이 돼주기 때문이다. 대만은 토지개혁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제시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이뤄지려면 농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제조업과 교역이 필요하다. 이 단계에서 성공 여부는 농업을 통해 확보된 역량을 서비스업이 아닌 제조업으로, 특히 국제 경쟁력을 갖춘 대규모 제조업으로 유도하는 것에 달렸다. 여기서 한국의 사례가 강조된다. 한국은 일본이나 대만에 비해 토지개혁의 성과가 낮았지만, 제조업 육성과 수출 증진에서는 어떤 나라보다 탁월했다.
소규모 농가를 육성하고 제조업을 키우는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서 금융 부문의 통제와 관리는 필수적이다. 국가가 은행을 틀어쥐고 제조업체에게 특혜 대출과 함께 수출 증진이라는 압력을 동시에 부여하는 방식이 유효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IMF 등 국제기구들이 개발도상국을 향해 자본시장 개방을 훈수해온 것은 명백히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가가 금융 부문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개발 성과가 달라진다”며 산업 프로젝트로 자금을 돌리고, 해외 자금 흐름이 개발 기획을 방해하지 않도록 국제적인 자금의 유입과 유출을 엄격하게 제한한 것이 성공의 원인이었다고 분석한다.
이 책은 한국의 산업화 역사에 대한 리뷰로도 읽을 수 있다. 한국 경제개발사는 상당한 비중으로 세세하게 다뤄진다. 특히 토지개혁이나 금융 통제는 그동안 한국의 경제개발과 관련해 중요하게 거론되지 않았던 요소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또 이 책은 한국의 현대사 인식과 관련해 여러 중요한 논점들을 제기한다. 토지개혁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적 업적 중 으뜸으로 꼽히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끝까지 토지개혁에 저항했고 미군정이 지속적으로 압박해 이뤄졌다고 설명한다.
일본의 식민지배 경험이 한국이 산업화로 나가는 토대와 아이디어가 됐다는 시각도 엿보인다. “산업화에 대한 사상은 일본에서 식민지인 한국과 대만, 근대적 개발이 약 20년 뒤처진 중국으로 확산됐다” “일본에서 진행된 산업화의 직접적인 영향으로부터 단절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개발에 필요한 제조업정책을 배우기 위해 일련의 국제기구들(특히 세계은행)이 설립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일본은 유럽의 식민국들과 달리 뒤늦게나마 식민지에 제조공장을 지었다. 그 결과 식민지 시대 이후에 지도자들이 따를 수 있는 산업화의 표본이 생겼다” 등 식민지근대화론을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예민한 지점이다. “개발은 철저히 정치적인 과업이다”라고 보는 저자는 그를 경이롭게 평가한다. 이 책이 서술하는 한국 경제개발사에서 주인공은 단연 박 전 대통령이다. 그는 수출 중심 제조업이 경제개발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그 방향으로 기업과 은행, 심지어 국가를 결집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아시아의 힘]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패, 무엇이 갈랐나
입력 2016-01-22 04:00 수정 2016-01-22 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