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시력 40년 老시인, 노년의 부끄러움을 읊다

입력 2016-01-21 18:47
김광규 시인은 “내 시는 양파처럼 여러 껍질로 되어 있다. 얼마나 속속들이 읽을 수 있는 가는 독자의 몫”이라고 말했다. 서영희 기자
“온갖 부끄러움을 속속들이 아는 친구/ 또 한 명이 떠나갔다 그렇다면/ 나의 부끄러움 그만큼 가려지고/ 가려진 만큼 줄어들었다/ 아니다/ 이제는 그가 알던 몫까지/ 나 혼자 간작하게 되었다 (중략) 부끄러움이 속으로 쌓여/ 나이테를 늘리며/ 하루 또 하루/ 나를 살아가게 하는가.”(‘부끄러운 계산’ 중)

김광규는 누가 뭐래도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의 시인이다. 1979년 발간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 수록됐던 이 시는 4·19세대에게는 자화상처럼 애송됐다. 그 때 혁명보다는 월급과 처자식을 더 걱정하는 중년을 아프게 돌아봤던 그가 이제 인생 칠십 고개를 지나가고 있다. 부끄러움이 시적 천성인 것처럼 지금은 노년의 부끄러움을 얘기한다. 그의 시는 일상의 기록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만치 관념적인 언어유희를 거부한다.

“맞아요. 구체적인 사실을 보여줌으로서 이게 늙음이구나하고 독자들이 느끼고 깨닫게 하고 싶었지요.”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했으니 시력 40년이 넘었다. 쉬지 않고 시의 밭을 갈아 열한 번째 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문학과지성사)을 낸 노시인을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올 겨울 가장 매서운 바람이 불어 바깥 거동이 걱정스러웠다. 시집에 건강과 관련된 시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네 번째 요추를 다치고 8주 동안 허리병을 앓았다’ ‘수술실로 들어섰다 이승에서 저승으론 넘어가듯’ ‘비행기가 이륙한 뒤 나무토막처럼 통로에 쓰러졌다가’ 등. 그는 “시집 안에 나에 관한 정보가 다 들어 있어요. 유서를 쓰다말았다는 내용의 시도 실제 일이지요”라며 허허 웃었다.

늙어가는 자신을 관조하듯 바라보는 태도는 속도의 시대에 묘한 울림을 갖는다. 시선이 머무는 대상 역시 버려지는 것, 낡은 것들, 약한 것이나 감정으로 치자면 밀려나는 불안감 같은 것이다. ‘난간 없는 계단’ ‘녹색 두리기둥’ ‘뒷바퀴 하나 빠진 세 바퀴 자전거’….

그의 시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용어로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하나의 장면이 선연히 보이지만 그것이 마음에 일으키는 파문은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쉽게 읽히지만 곱씹을수록 또 다른 맛이 나는 시다. 그는 “시가 독자를 읽어가는 요즘의 시대에는 쉬운 언어로 독자와 소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면서 “일부러 어렵게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에게 내 말이 꼰대처럼 들리겠지만 그들도 나이가 들면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쉽게 읽힌다고 쉽게 쓰는 것은 아니다. 초고를 20번은 고친다는 그는 자신의 시작 태도를 ‘허세 부리지 않는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시집에는 2011년 종심(從心·70을 일컫는 말)을 맞이한 시인이 지난 가을까지 4년 동안 바라본 세상과 기억들, 앞서 보낸 동료들에 대한 애도와 담담한 내일맞이가 담긴 66편이 수록됐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