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오스카상’에 뿔난 흑인들, 시상식 보이콧 선언… 아카데미 영화상 후보 백인 일색 파문

입력 2016-01-19 21:31 수정 2016-01-19 22:29
흑인들이 18일(현지시간) ‘마틴 루서 킹 데이’를 맞아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생전 인종 차별 철폐 운동에 앞장섰던 마틴 루서 킹 목사를 기리며 행진하고 있다. 킹 목사는 1968년 흑인 청소부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멤피스를 방문했다가 한 모텔에서 암살됐다. 올해 행진은 백인 경찰에 의한 흑인 사망과 문화예술계에서의 흑인 차별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하게 치러졌다. EPA연합뉴스
“새하얀(lilywhite·흑인을 차별하는) 오스카상을 거부한다.”

지난해 백인 경찰의 흑인에 대한 과잉 대응으로 떠들썩했던 미국에서 새해 벽두부터 또다시 유색인종의 사회적 차별 이슈가 부각되고 있다. AP통신과 뉴욕타임스(NYT) 등은 18일(현지시간) 88년 역사의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오스카상)이 인종 차별 논란에 휩싸여 최대 위기를 맞았다고 보도했다.

이날 유명한 흑인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59)와 흑인 여배우 제이다 핑킷 스미스(45)는 다음 달 28일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 보이콧을 전격 선언했다.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지난 14일 아카데미 시상식 주연·조연상 후보로 백인 20명만으로 채워진 명단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18일은 흑인 차별에 맞서 싸운 마틴 루서 킹(1929∼1968) 목사의 탄생일에 즈음해 연방정부가 1986년부터 공휴일로 지정한 ‘마틴 루서 킹 데이’다. 기념일 선포 30년째를 맞은 이날 흑인 문화예술인의 대표 격인 이들이 ‘인종 차별’ 이슈를 정면으로 거론한 것이다. 특히 비교적 차별이 덜하다고 알려진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 유색인종 차별 논란이 불거져 나오면서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있다.

리 감독은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려 “어떻게 2년 연속 후보자 40명이 모두 백인일 수 있는가”라며 “온통 흰색 천지인 아카데미를 더는 지지할 수 없다”고 썼다. 이어 “흑인한테는 미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할리우드에서 출세하기가 더 어렵다”고 꼬집었다.

영화배우 윌 스미스의 아내이자 ‘매트릭스’ 등에 출연한 핑킷 스미스도 페이스북 동영상에서 “유색 인종이 이젠 아카데미 시상식을 무시해야 할 시기가 왔다”면서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집단의 인정을 구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윌 스미스가 주연한 영화 ‘뇌진탕(Concussion)’은 미국프로풋볼(NFL) 선수의 뇌진탕과 그 트라우마를 다룬 것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오스카상 후보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자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오스카는 너무 백인 중심적(OscarsSoWhite)’이라는 해시태그가 분출했다. 아카데미상 후보자 중 유색인종이 2년 연속 한 명도 끼지 못한 건 1997∼1998년 이후 처음일 만큼 이례적이라고 NYT가 보도했다.

리 감독은 “진짜 전쟁은 아카데미 시상식장이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 사무실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제작자들이 백인 위주여서 유색인종을 차별한다는 것이다. 미국시민자유연맹은 지난해 5월 영화계의 인종 차별 문제를 조사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기도 했다. 미국영화감독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2013∼2014년 미국 영화의 82%는 백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이를 두고 흑인 인권운동가인 알 샤프톤 목사는 “할리우드는 오를수록 흰색(만년설)만 보이는 로키산맥 같다”고 비판한 바 있다.

AP통신은 “아카데미의 인종차별에 대해 올해처럼 스타급 흑인 영화인들이 반발하기는 처음”이라며 사태가 더 확산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워싱턴=전석운 특파원, 손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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