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직원이라는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예금을 보호해주겠다며 통장에 있는 돈을 모조리 찾아 집 전화기 밑에 두라고 했다. 계좌에는 5000만원이 있었다. 이 큰돈을 수표도 아닌 현금으로 뽑아 다른 곳도 아닌 ‘집 전화기 밑’에 두라니….
이해가 안 되는 이 주문이 당시엔 최면제라도 탄 음료 같았다. 남자 말을 듣고 있으면 최첨단 금융범죄를 당해 돈이 당장에라도 증발할 것 같은 위기감에 조바심이 났다. 이어 특단의 조치인 것처럼 그는 “동사무소(주민센터)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재발급받으라”고 했다. 집을 비웠을 때 그가 찾아왔다.
지난달 18일 경기도 오산에서 이렇게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피해가 발생할 뻔했다. 너무 늦게 않게 의심이 든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한 덕에 집으로 침입한 범인을 체포할 수 있었다. 이런 식의 보이스피싱이 최근 급증했다.
경찰청이 지난해 발생한 보이스피싱 사건을 분석한 결과 경찰·검찰·금융감독원 등을 사칭하는 방식이 68.6%로 대다수였다. 은행 등 금융기관이라며 접근한 사례는 20.1%였다.
돈을 가로채는 유형은 계좌이체가 72%로 가장 많았다. 가짜 사이트에 접속시켜 개인정보를 탈취한 뒤 인터넷뱅킹으로 돈을 빼가는 피싱결합 방식도 22.2%로 빈번했다. 금감원 등 공인기관 직원이라며 직접 찾아와 돈을 받아가는 대면편취형이 3.5%, 돈을 지켜줄 테니 지하철 물품보관함 등에 넣어두라고 지시하는 식의 물품보관형이 1.7%였다.
거액을 장롱이나 냉장고 등에 보관하게 한 뒤 훔쳐가는 절도형(0.4%)과 한패인 퀵서비스·택배기사를 보내면서 돈을 맡기라고 하는 배송형(0.2%)도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대전에서는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를 사칭한 이들이 예금 9000만원을 모두 찾아 냉장고에 보관하게 한 일이 있었다.
대면편취나 절도형은 아직 비중이 낮지만 지난해 9월 이후 급증했다는 점에 경찰은 주목한다. 지난해 발생한 전체 해당 사례 296건 중 약 70%인 206건이 9∼12월 발생했다. 앞으로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직접 만나 돈받고… 집에서 훔치고… 대범해진 보이스피싱
입력 2016-01-19 2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