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에서 겨울을 지내고 있는 가창오리 수십만 마리가 해질 무렵 한꺼번에 날아오르며 붉은빛 하늘을 배경으로 펼치는 황홀한 군무(群舞)다. 전 세계에 있는 가창오리의 대부분이 우리나라에서 월동한다. 러시아 시베리아와 연해주 등지에 퍼져 여름을 나는 가창오리는 약 40만 마리. 4∼5월쯤 태어난 새끼가 비행 능력을 익히면 가창오리는 시베리아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여행을 떠난다. 처음 들러 머무는 곳이 충남 서산 천수만이다. 한 달 정도 머물다가 남쪽으로 이동한다.
금강과 고창 일대에는 약 35만 마리가 왔다고 한다. 나머지는 전남 영암의 영암호, 해남의 고천암호, 경남 창원 주남저수지 등으로 흩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만 세계적인 희귀조로 ‘멸종위기 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에 수록돼 국제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이 같은 가창오리가 대거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생태적 가치가 높은 셈이다.
최근 가창오리 군무를 볼 수 있는 여행지로 떠오른 전북 고창의 동림저수지를 지난 14일 찾았다.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곳은 가창오리 탐조여행에 안성맞춤이다. 적당한 너비의 강과 호수, 펼쳐진 농경지 등 가창오리에게 필요한 천혜의 생태 조건을 갖췄다. 더욱이 주변에 인적이 드물고 아직 덜 알려진 덕분에 찾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적어 몇 년 전부터 가창오리가 몰려들고 있다. 천수만 등지에서 월동하던 오리떼가 각종 개발 사업과 탐조 인파를 피해 좀 더 외진 곳으로 몰려온 것 같다는 분석이다. 가창오리의 군무는 천적을 피해 밤에 먹이를 찾아 들녘으로 이동한 뒤 아침에 저수지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덕분에 거의 매일 두 번이나 볼 수 있다.
낮에 찾은 동림저수지는 조용하고 평화롭다. 천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저수지 가운데 떼지어 자리를 잡은 가창오리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아 마치 거대한 검은 줄이 쳐진 듯하다.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며 하늘을 노랗고 붉은빛으로 채색할 무렵 가창오리들은 이쪽저쪽으로 조금씩 움직이며 화려한 비행을 준비한다.
이윽고 오후 6시쯤 선두의 힘찬 오름이 이어지자 일제히 날갯짓을 한다. 차례로 공중으로 떠오른 무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하며 다양한 모양으로 세를 과시한다. 수십만 개의 점으로 그려진 점묘화(點描畵)나 다름없다. 안 움큼 떼어낸 듯 떨어졌다가도 다시 뭉치고 소용돌이처럼 밑으로 휘감겼다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른다. 검은 오로라처럼 하늘을 휘저으며 장관을 연출한다. 때로는 1㎞가 넘는 크기를 형성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다. 저수지의 한적한 풍경과 오리떼, 자연의 아름다움 그 자체다. 군무는 짧게는 2∼3분에서 길게는 20∼30분까지 이어진다. 군무의 장관을 선사하는 가창오리들은 초봄까지 머물다 3월쯤 시베리아 등지로 돌아간다.
◇촬영 팁=내비게이션에서 동림리 또는 동림저수지 검색하시면 조금 다른 곳을 안내해준다. 주소로 ‘고창군 성내면 신성리 681-4’ 또는 ‘고창군 성내면 신성리 674-5’로 검색해야 한다.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IC로 빠져나오면 22번 국도를 따라 가다 제하사거리에서 우회전한 뒤 동산삼거리에서 성내면으로 빠지자마자 좌회전해 747번 지방도를 이용한다. 이후 신성리에서 ‘관동, 당사동, 만각동’ 방면으로 좌회전해 좁은 농로를 따라가면 된다. 선운산IC에서 5∼20분쯤 걸린다.
저수지 둑방 동쪽 끝부분이 포인트. 차량을 15대가량 주차할 수 있다. 군무는 6시쯤 펼쳐진다. 조금 일찍 5시쯤 도착해 자리를 잡으면 석양과 함께 여유있게 군무를 감상할 수 있다. 군무를 카메라에 담으려면 표준이나 광각 줌 렌즈를 준비하면 된다. 삼각대는 사실상 필요없다.
가창오리는 몸길이 약 40㎝, 날개길이 약 21㎝의 기러기목 오릿과의 조류다. 화려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수컷이다. 얼굴 앞쪽 절반이 노란색이고 중앙의 검은 띠를 경계로 뒤쪽 절반은 녹색으로 윤이 난다. 부리는 검고, 홍채는 갈색이며 다리는 회색이 도는 노란색이다. 암컷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갈색이며 배를 제외한 몸 전체에 붉은 갈색의 얼룩무늬가 있다. 뺨과 눈 뒤쪽은 노란색이고 검은 무늬가 있으며 배는 흰색이다. 부리가 시작되는 부위에 흰 점이 뚜렷하다.
고창=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