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수은주가 영하 14도까지 떨어진 19일 아침. 직장인 최모(30)씨는 영등포역 앞 노점에 잠시 멈춰 섰다. 토스트 한 조각과 두유병을 양손에 들고 끼니를 때웠다. 그는 “노점에 길게 줄선 손님들을 볼 때면 직장 때려치우고 장사나 해볼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평 남짓 길에서 벌어지는 노점상의 세계도 최씨 같은 직장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익부 빈익빈이 뚜렷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잠시라도 도태되면 저만치 밀려나기 일쑤다. 서울 거리에 빼곡한 노점을 가리켜 ‘그들만의 세상’이라 하기에는 ‘그들도 우리처럼’ 살고 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은 옛말
서울역 주변에서 마주친 장모(57·여)씨의 노점은 단출했다. 커피·프림·설탕이 든 유리병 몇 개가 허전한 선반을 채웠다. 장씨는 “커피 한 잔에 1000원 한 장 받는데 요즘은 영 장사가 시원찮다”고 말했다. 형편이 나은 사람은 커피전문점을 찾고, 형편이 안 되는 치들은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신다는 하소연이 뒤따랐다. 주전자에 데워둔 물은 하염없이 식어버리곤 한다. 노점에 둘러놓은 얇은 비닐막은 거센 찬바람에 속수무책이다.
영업허가를 얻은 노점도 있지만 대부분은 불법이다. 사업자등록 없이 영업하니 세법 위반이고, 도로를 무단 점용하니 도로법 위반이다. 음식을 팔면 식품위생법 위반이 된다. 하지만 ‘오갈 데 없는 서민의 보루’라는 공감대 때문에 지자체에선 노점 영업을 용인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서울 거리에 장씨 같은 생계형 노점만 있는 건 아니다. 꽤 많은 보증금과 월세에 노점 자리를 임대하고, 특히 목 좋은 자리는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권리금도 붙는다.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여러 노점을 운영하는 ‘기업형 노점상’도 더러 있다. ‘깔세’(보증금 없이 월세를 한번에 지불하고 단기로 자리를 임대하는 방식) 자리라도 구해 장사하려 해도 목돈을 준비해야 한다.
서울 청계천, 종각, 남대문 일대에서 30년간 노점을 해온 김모(63)씨가 그런 경우였다. 김씨는 “노점으로 한몫 잡으려면 장사 수완도 필요하지만 좋은 자리를 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유동인구가 많은 자리에서 박리다매로 매출을 늘린 뒤 노점 자리와 상품을 다른 노점상에 넘기는 방식으로 한번에 수천만원씩 벌곤 했다.
김씨는 밑천의 중요성도 역설했다. 그는 “권리금이 붙는다는 말은 벌이가 된다는 뜻”이라며 “푼돈 장사할 게 아니라면 권리금을 들여서라도 좋은 자리를 맡아야 한다. 권리금은 나중에 올려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의 조언은 ‘빚을 내서라도 땅과 아파트를 사라’는 여느 신도시 부동산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노점계의 포털사이트 ‘노점상’ 둘러보니
‘노점넷’과 ‘노점닷컴’. 얼핏 듣기엔 생소하지만 노점상에겐 익숙한 웹사이트들이다.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이들은 거리에서뿐 아니라 인터넷을 뒤지는 일에도 품을 들인다. 이런 사이트에는 뭘 팔아야 하는지, 어디서 팔아야 하는지, 팔 물건을 얼마에 사올 수 있는지 ‘노점에 관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노점상들이 남긴 게시물에선 치열한 삶의 흔적이 묻어나기도 한다.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이끌려 노점에서 뭔가 사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박리다매는 노점 영업의 기본 중 기본이다. 노점 사이트에는 ‘노점 아이템’을 판매하는 게시판이 마련돼 있다. ‘중고의류 ㎏당 1000원, 가방은 5000원’ 같은 게시물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양말 한 족은 200원, 선글라스는 1500원이면 구할 수 있다.
노점이라 해서 고리타분한 물건만 취급하는 건 아니다. 최신 트렌드를 읽어야 성공할 수 있는 건 노점도 마찬가지다. 홍대 앞 거리에 좌판을 벌이고 캐릭터 상품을 파는 신모(30·여)씨는 “유행 아이템을 찾기 위해 인터넷 노점상을 자주 찾아 살핀다”고 말했다.
그는 재작년 서울 석촌호수에 ‘러버덕’(오리 모양 고무인형)이 떴을 때 노점에서 러버덕 인형과 볼펜을 팔았다. 영화 ‘미니언즈’가 유행했을 때는 미니언즈 칫솔을, ‘스타워즈’ 개봉에 맞춰 스타워즈 피규어를 대량으로 떼서 팔았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인터넷 노점상에선 ‘선배’ 노점상이 ‘후배’ 노점상에게 운영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한다.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를 선택하라’ ‘젊은 감각이 필요한 틈새 아이템을 골라라’ ‘무엇보다 건강에 유의하라’ 등 굳이 노점에 한정지을 필요 없는 조언이 오고간다. “노점을 시작하려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와 정신력”이라는 게시물도 눈길을 잡는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
한 평 길 위의 삶, 노점상도… “도태되면 끝” 무한경쟁
입력 2016-01-20 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