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쁜 놈 캐릭터’ 오히려 박수 받는다… TV 드라마 ‘악역 탐구’

입력 2016-01-20 04:14

배우들이 악역 맡기를 꺼려하는 때가 있었다. 관객이나 시청자들이 캐릭터와 배우를 동일시하면서 자칫 나쁜 이미지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톱 배우들이 악역을 하는 경우는 그래서 거의 없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달라졌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악역이 오히려 사랑받는 분위기다. 캐릭터는 미워할지라도 완벽하게 역할을 소화해낸 배우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배우 유아인은 영화 ‘베테랑’에서 소시오패스 성향의 악역 조태오를 연기했다. 완벽하게 나쁜 놈이었다. 하지만 관객은 유아인에게 열광했다. “유아인이 아닌 조태오를 상상할 수 없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이제 악역은 배우의 연기력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는 매력적인 존재가 됐다. TV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이다’(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속 시원하게 해 주는 캐릭터)라며 사랑받는 악역이 있는가 하면, 착해빠져서 보는 사람 답답하게 해 ‘고구마’(고구마 여러 개를 먹고 목이 멘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캐릭터)로 불리는 주인공도 있다.

남규만은 싫지만 남궁민은 좋다…‘리멤버’의 ‘절대 악역’ 남규만

SBS ‘리멤버-아들의 전쟁’에는 ‘절대 악역’이라 부를만한 인물이 등장한다. 배우 남궁민이 연기하는 남규만이다. 안하무인 재벌 3세로 살인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기만 하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가난한 서재혁(전광렬)에게 뒤집어씌우고는 이런다. “법정에 서는 것보다 아버지한테 찍히는 게 더 살 떨려.” “(누명쓴 게) 내 잘못이야? 쥐뿔 가진 거 없는 그 놈 잘못이지?”

남규만은 아버지의 정서적 학대를 받으며 자랐으나 그걸로 동정하기엔 죄질이 심히 안 좋다. 곱게 봐줄 만한 구석이 전혀 없다. 하지만 배우 남궁민에 대해서는 호평 일색이다. 눈빛, 손짓, 말투, 표정까지 남규만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캐릭터는 밉지만 배우는 미움 받지 않는 것이다.

● 애처로운 흙수저 출신… ‘애인있어요’의 ‘사연 있는 악역’ 민태석

SBS ‘애인있어요’에서 공형진이 연기하는 민태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인교사도 서슴지 않는 자다.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없애버려” “치워버려”라고 지시한다. 주인공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

하지만 맘 놓고 미워하기엔 어쩐지 마음이 간다. 가진 것 없지만 똑똑한 머리 하나 믿고 재벌가에 장가 와 동생을 의사로 키웠다. 동생에 대한 사랑도 끔찍하다. 금수저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흙수저라는 애처로운 면도 종종 부각된다. 아내 최진리(백지원)와 함께 개념 발언, ‘사이다’ 대사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한다.

그가 나쁜 놈이 된 사정을 알고 있는 시청자들은 “어쩌면 민태석도 피해자”라는 복잡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공형진의 맛깔스러운 연기까지 더해지면서 민태석을 마냥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 연기 보는 재미가 있다…‘육룡이 나르샤’의 ‘코믹한 악역’ 길태미

최근 가장 사랑 받은 악역은 SBS ‘육룡이 나르샤’의 길태미라고 할 수 있다. 길태미는 조연급 배우 박혁권을 스타로 만들었다.

드라마 속 가상 인물인 길태미는 고려 말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악의 축이다. ‘삼한제일검’이면서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검을 쓴다. 하지만 짙은 화장, 나긋나긋한 몸짓, 경박스러운 말투로 보는 이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킨다. 그동안 없었던 부류의 인물로 자연스러운 연기가 가능할까 싶은데, 박혁권이 해냈다. 지나치지도 넘치지도 않는 연기로 보는 이들을 몰입케 했다. 길태미가 정도전(김명민)의 호위무사 이방지(변요한)와 대결 끝에 숨지는 장면은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 한 대 쥐어박고 싶다…‘치즈인더트랩’의 ‘민폐형 악역’ 김상철

시청자들의 공분을 일으키는 악역은 남규만이나 길태미처럼 드라마틱한 인물이 아니다. tvN ‘치즈인더트랩’에서 진상 선배로 등장하는 김상철(문지윤) 같은 부류다.

김상철은 범법을 일삼지는 않는다. 다만 일상에서 수시로 사소한 악행을 저지른다. 돈 많은 후배에게 빌붙고 과제를 갈취하는 등 바늘도둑의 행태를 보이는데 마냥 뻔뻔하다.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짜증이 치미는 생활밀착형 악역이다.

시청자들은 길태미 같은 나쁜 놈보다 김상철 같은 짜증유발자를 더 미워한다. 자신 주변의 민폐형 인물들을 떠올리며 “이런 선배 꼭 있다” “한 대 쥐어박고 싶다”며 격하게 공감한다. 김상철을 얄밉게 연기해내는 문지윤은 ‘치즈인더트랩’의 신 스틸러라 불리며 관심을 모으고 있다.

● 고구마 100개 삼킨 듯…‘내 딸 금사월’의 ‘답답한 주인공’ 금사월

MBC ‘내 딸 금사월’의 주인공 금사월(백진희)은 전형적으로 착해빠진 캐릭터다. 등장인물들과 시청자들이 다 아는 비밀을 금사월만 모른다. 착한 표정으로 웃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다기보다 갑갑할 뿐이다.

금사월의 답답한 행보는 시청자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주인공이지만 오로지 답답하다는 이유만으로 시청자들의 짜증을 유발하고 있다. 백진희의 연기는 나무랄 데 없다는 평가다. 하지만 캐릭터가 매력이 없다보니 백진희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반응이 많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