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의료분야 개척자, 로제타 셔우드 홀] 메리 스크랜턴·김점동·제임스 홀과 거룩한 동행

입력 2016-01-18 20:00
로제타가 아꼈던 조선 소녀들(1894년)로 왼쪽부터 여메레, 노수잔, 박에스더. 하희정 박사 제공
1891년 로제타 홀이 받았던 생일편지로 당시 이화학당 교사 이경숙(위)과 봉순오마니(아래)가 보낸 서신. 하희정 박사 제공
로제타는 가난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조선여성들을 치료하면서 보구여관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역사는 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성 의료에 대한 로제타의 비전은 1870년 인도에 세워진 동양 최초의 여성병원이 롤 모델이었다. 이 병원을 세운 여성 의료개척자는 클라라 스웨인이다. 그녀는 로제타가 공부한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의 졸업 선배였다. 로제타는 재학 중 그녀의 강연을 듣고 처음 동양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나중에는 조선에서의 마지막 꿈이던 여자의대를 계획하면서 인도까지 찾아가 이 병원을 견학했다.



소울 메이트, 김점동

하지만 새로운 역사는 비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함께 하는 이가 없다면 꿈은 현실이 되기 어렵다. 로제타는 자신보다 5년 앞서 개척자로 조선에 먼저 온 메리 스크랜턴을 어머니처럼 의지했다. 그의 기품과 합리적 성품에 금방 빠져들고 말았다. 덕과 지혜를 겸비한 그녀를 여성 선교사들은 여성 감독처럼 존경했다. 1890년 10월 진료를 시작한 지 열흘 쯤 지났을 때 메리 스크랜턴이 두 천사를 보내주었다. 이화학당에서 영어를 제일 잘 한다는 김점동이라는 소녀와 그의 단짝 친구인 일본인 소녀 오와가였다. 두 소녀는 왕진까지 따라다니며 로제타를 충실히 도왔다.

열 네 살인 김점동은 매우 영특했다. 어릴 때의 로제타처럼 당차고 호기심이 많았다. 로제타는 어린 소녀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면서 이들의 미래와 조선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91년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 겨울방학을 이용해 5명의 소녀들을 데리고 의료강습반을 시작했다. 두 소녀 외에 노수잔, 봉순이, 애니가 첫 학생으로 참여했다. 생리학부터 가르쳤다. 조선에서 이루어진 첫 여성의료교육이었다.

김점동은 학습 속도가 빨랐다. 처음에는 두려워서 뼈를 만지지도 못하더니 곧 뼈를 배우고 싶어 안달했다. 한국인들이 혐오스럽게 생각하던 해부실습에 대해서도 먼저 질문 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세례를 받고 ‘에스더’라는 새 이름까지 얻게 되자 서양의학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그 용기를 일찍부터 알아본 로제타는 그가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는 에스더의 미국유학을 계획했다. 훗날 그의 꿈대로 에스더는 유학을 마치고 조선의 첫 의사가 되어 돌아왔고, 로제타와 자매로, 그리고 동지로 생을 다할 때까지 함께 했다. 그야말로 나이와 인종, 피부색을 초월한 영원한 ‘소울 메이트’였다.

홀부인이 되다

1891년은 로제타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해였다.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인 12월, 잠시 이별을 고했던 약혼자 제임스 홀이 의료선교사가 되어 조선에 왔다. 두 사람은 이듬해 여름,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이 결혼에 골인하기까지는 메리 스크랜턴의 공이 컸다. 당시 독신 여선교사들은 해외여선교부에 5년간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로제타도 예외는 아니다. 이때 먼저 나서서 그의 결혼소식에 실망한 해외여선교부를 설득하고 제임스 홀을 한국으로 보내준 것이 메리 스크랜턴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로제타는 ‘로제타 홀’ 또는 ‘홀부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주변의 우려와 달리 로제타는 결혼 후 더욱 안정된 모습으로 치료와 의료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로제타의 새로운 여정에 고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면 할수록 여성으로서의 분노와 인간에 대한 슬픔이 밀려들었다. 언어도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고린도서를 묵상하며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는 것보다 사랑이 우선’이라고 늘 되뇌었지만, 가슴을 죄어오는 현실은 피할 수 없었다. 특히 한국말이 서툴러 죽어가는 환자에게 그 어떤 말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오면 절망감은 더욱 커졌다.

1891년 6월 초 서대문 밖 한 움막으로 왕진을 갔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결핵이었다. 심한 기침과 복통이 마지막 생명을 갉아 먹고 있었다. 환자는 남편과 함께 아이 하나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종살이를 하던 중 병이 나 주인에게 쫓겨났다고 했다. 그녀는 3주를 버티지 못했다. 그녀의 죽음은 로제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왜 하나님은 열심히 산 그녀에게 이런 고통스런 삶을 지속하게 하셨을까.’

이 일로 로제타는 피해갈 수 없는 질문 하나와 마주하게 되었다. 복음을 접하고도 실천하지 않는 이들과 복음을 접하지 못했어도 진실한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로제타는 성서에서 그 답을 찾아냈다. 복음을 접하고 실천했던 이들과 복음을 접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따라 진실하게 산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성서가 준 답이었다.



조선여성과 하나 되어

로제타를 분노하게 한 사건도 있었다. 1891년 11월 두 번째 맞는 추수감사절, 조선 여성들을 식사에 초대했다. 의료강습반 소녀들과 이화학당 교사 이경숙, 사라로 불리던 봉순오마니, 그리고 입원환자였던 과부 김씨. 하지만 김씨는 초대된 식탁에 오지 못했고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종살이 하던 조카에게 탈출해 결혼하라고 부추긴 죄목으로 한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던 여성이었다. 20여명의 남자 죄수들 틈에 끼어 있었던 유일한 여성으로 집단 성폭행을 당해 말 그대로 ‘거의 죽은 상태의 영혼’으로 병원에 왔다.

당시 남편 없는 여성은 그 어떤 사회적 보호도 받지 못했다. 로제타는 수차례 감옥을 오가며 치료하다가 그녀를 간신히 병원으로 빼내왔지만 결국 학대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로제타는 그 잔인함에 치를 떨며 “짐승만도 못한 그 인간들을 생각하면 내 영혼이 거꾸로 일어서는 듯하다”고 기록해 놓았다. 모두가 기뻐해야 할 추수감사절이었지만 그의 일기에는 여성인권의 불모지였던 조선의 현실에 가장 분노했던 슬픈 날로 기록되었다. 로제타는 여성들이 처한 말도 안 되는 현실에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깊은 연민을 느끼며 조선여성들과 하나가 되어갔다.

하희정 박사<감신대 외래교수·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