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고세욱] 경제민주화에 응답해야

입력 2016-01-17 18:17

부의 편중 완화, 동반성장 등을 골자로 한 ‘경제민주화’는 현 정부 들어 사실상 잊혀진 단어였다. 중도층의 지지를 얻어 정권 창출에 기여한 공약임에도 정작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힘을 잃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초 “경제민주화 관련 정책이나 입법이 기업을 위축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고 경제민주화는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런 경제민주화가 지난해 말부터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19일 대법원은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영업일을 제한한 현행 유통법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중소 유통업과의 상생발전’을 근거로 “현행 법은 헌법 제119조 제2항에 정한 헌법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헌법 제119조 제2항은 ‘국가는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경제민주화’ 조항으로, 판결문에 적시되기는 처음이다.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대법원의 판결이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면 연초 청와대 등의 경제민주화 평가는 뜬금없음으로 화제가 됐다. 청와대는 지난 3일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못한 경제민주화를 실천했다”고 자평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1일 인사청문회에서 “정부의 경제민주화 성적이 100점 만점에 80점”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대)기업 규제 완화를 입에 달고 살아 왔다. 지난달 정부가 발표한 ‘2016년 경제정책방향’에는 현 정부 들어 처음으로 경제민주화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외교나 대북 정책이면 몰라도 경제, 그것도 경제민주화를 업적으로 내세울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새해 벽두부터 진행된 정부발 경제민주화 공세는 실소를 자아냈다.

자화자찬식 주장에 허점도 많았다.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정부가 경제민주화 20개 법안 중 13개 법안의 입법을 완료했다고 했지만 법안 20개 중 박 대통령의 명시적 경제민주화 공약 사항이 아닌 것이 5개 포함됐다. 공약사항 가운데 일부는 20개 법안에서 제외됐다. 정부가 편의적으로 법안을 취사선택한 셈이다.

하지만 정부의 경제민주화 뜬금포는 양극화 해소, 동반성장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사회에 환기시키는 순기능도 하고 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최근 한 신년 세미나에서 “재벌에 의해 한국경제 성장이 지탱될 것이라는 기대를 확실히 버려야 할 때”라고 말했다. 보수 성향 원로들 모임인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은 신년회에서 “세제 개혁을 통해 최상층이 더 많은 세금을 내게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 대통령의 멘토에다 경제민주화 전도사였던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총선을 앞두고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에 합류했다. 여야 간 ‘경제민주화’ 논쟁 재연이 불가피해졌다.

경제민주화 시즌2 개막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대기업 경제력 편중은 갈수록 심화되는 가운데 대기업 주도 성장은 한계에 봉착했다. 산업연구원 조사 결과 2014년 기준 20대 그룹 계열사 가운데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갚기 어려운 ‘한계기업’ 비중은 10곳 중 4곳에 달한다. 비록 부채 확대 주범으로 냉소의 대상이 됐지만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의 “가지 않은 길을 가겠다”는 취임 일성은 지금 한국경제에 간절히 울려야 한다. 경기 침체를 수출 대기업에 대한 지원을 통해 타개할 시기는 지났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와 경영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상생이라는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할 때가 왔다. 경제민주화 의제의 부상이 반가운 이유다.

고세욱 경제부 차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