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극무대 휩쓴 연우무대 3인방 김석만·김광림·이상우 교수 “후학 키운 게 큰 보람”
입력 2016-01-18 04:02
극단 연우무대는 한국 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1977년 서울대 문리대 연극회 출신이 주축이 돼 만든 연우무대는 당시로는 드물게 창작극 전문극단을 표방했다. 이후 이곳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수많은 연출가와 극작가, 배우가 배출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연우무대의 주요 멤버였던 김석만, 이상우, 김광림은 1980∼90년대 ‘한씨 연대기’ ‘칠수와 만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날 보러 와요’ ‘늘근 도둑 이야기’ 등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하며 연극계를 선도했다. 또 이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연극원 교수로 부임해 후학을 길러냈다. 최근 한국 연극계와 뮤지컬계를 휩쓸고 있는 신진 아티스트들의 상당수는 세 사람이 한예종에서 가르친 제자들이다.
선후배 사이인 3인방 가운데 김석만 교수가 오는 2월, 이상우 교수는 8월 한예종을 정년 은퇴한다. 김광림 교수는 2018년 2월 은퇴 예정이다. 연극계에서는 이들이 모두 은퇴하면 한 시대의 흐름 역시 막을 내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9일 올해 60주년을 맞은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소회와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김석만 교수는 지난해 12월 마지막 학기를 마친 뒤 11일부터 석 달간의 일정으로 남미 에콰도르 연극학교로 떠날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이상우 교수는 인터뷰 전날 극단 차이무 20주년 기념공연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양덕원 이야기’(1월 8∼31일 예술마당2관)의 막을 올렸고, 김광림 교수는 대표작인 ‘날 보러 와요’의 20주년 기념공연(1월 22일∼2월 21일 명동예술극장) 연습으로 눈 코 뜰 새 없었다.
오랜 친분을 가진 동료지만 이들은 만나는 순간부터 툭탁거렸다. 마치 학생들에게 강의하듯 예전 연극계 상황을 설명하는가 하면, 과거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을 놓고 시비를 따지기도 했다.
이상우 교수는 “늙으면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데도 자신이 기억했던 흔적을 앞세워 서로 맞다고 우긴다”고 했고, 김석만 교수는 “작품의 공연 연도 같은 걸 놓고 많이 싸운다. 남들에겐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들한테는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을 이어받았다. 김광림 교수는 자신이 쓴 희곡 ‘사랑을 찾아서’ 초판본을 김석만 교수가 연구실 짐정리를 하면서 발견해 건넨 일화를 꺼냈다. 그는 “어떻게 (나도 없는) 그 희곡을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었느냐”며 웃었다.
세 사람 모두 7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연극반에 들어간 게 ‘평생의 일’이 됐다. 이들은 배우로 무대에 섰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연기가 안 되니까 스태프를 한 것 아니냐”며 서로를 놀려대기도 했다. 하지만 김광림 교수는 “나는 연기를 잘했다. 미국에서 대학원 다닐 때 학교 연극에 출연한 나를 보고 배우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을 정도다. 그런데 내가 워낙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 연기하는 게 힘들었다”면서 “2001년 한국 영화 ‘와니와 준하’의 감독이 캐스팅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얘기해 그때 여주인공 아빠로 출연한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그동안 수많은 연극 작업을 해온 3인방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무엇이었을까.
이상우 교수는 현재 하고 있는 작업을 가장 중시하는 만큼 예전 작업은 잘 떠오르지 않는 편이라고 답했다. 반면 김석만 교수는 대표작인 ‘한씨 연대기’가 아닌 ‘금강’의 북한 평양 공연을 꼽았다. 시인 황석영이 쓰고 그가 연출한 ‘한씨 연대기’는 84년 검열 때문에 극단이 6개월 공연 정지 처분을 받아 막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듬해 신촌 연우소극장 개관작으로 공연돼 큰 인기를 끌며 각종 연극상을 휩쓸었다. 김 교수는 “신동엽 시인이 동학혁명을 소재로 쓴 동명 서사시를 바탕으로 한 ‘금강’이 2005년 6·15 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북한 초청으로 평양에서 공연될 때 내가 연출을 맡았다”며 “그 즈음 남북한 교류사업이 많이 취소됐는데, 이 작품은 우여곡절 끝에 성사됐다. 평양에서 이 작품을 보면서 뭉클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젊은 시절 작가들과 텍스트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던 것은 나이 들어 후회되는 점”이라고 털어놓았다.
김광림 교수는 대표작 ‘날 보러 와요’의 초연 첫날을 감동적 순간으로 들었다. ‘날 보러 와요’는 96년 2월 극단 연우무대에 의해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옛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됐다. 그는 “‘날 보러 와요’ 첫 공연이 끝났을 때 극장 안의 뜨거운 열기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첫날 공연 전까지 이 작품이 이렇게 좋은 평가를 얻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면서 “지금은 영화 ‘살인의 추억’ 원작이 된 좋은 희곡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당시엔 나 자신도 대본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이어 “올해 ‘날 보러 와요’ 20주년 기념공연에 권해효, 김뢰하, 유연수 등 초연 멤버들이 참가해 준 게 정말 고맙다. 오랜만에 이 친구들 보니 다들 나이를 먹긴 먹었더라”고 했다.
이상우 교수 역시 “원래 공연 전에 만들면서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관객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데 비해, 그다지 기대 없이 쉽게 만든 작품들은 반응이 너무 좋았다. ‘비언소’나 ‘거기’가 지금까지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 놀랍다”고 덧붙였다. 이어 “일찌감치 민복기 대표에게 극단을 물려주고 예술감독으로 남았는데, 결과적으로 극단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 거장들의 ‘연극계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뭘까?
교편을 잡느라 현장 작업은 줄일 수밖에 없었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난 제자들을 키워낸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김석만 교수는 “한예종 수업이 워낙 실기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학생들이 최다 20∼30편까지 작품을 만들어보고 대학로로 나간다. 아마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커리큘럼이 아닌가 싶다”고 뿌듯해 했다. 연우무대가 과거 이들이 활동하던 때와 달리 상업적으로 바뀐 것에 대해 세 사람은 “지금의 연우무대가 우리들이 활동하던 시기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시대에 따른 운영방식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입을 모았다.
남미 연극 공부를 시작하는 등 여전히 정력적인 김석만 교수와 달리 건강이 다소 좋지 않은 이상우 교수는 은퇴 후 강원도 고성으로 내려가 휴식을 취할 예정이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