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어도 한국 사회의 우울한 초상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새해다. 에너지가 필요한 시점이다. 첫걸음을 내딛는 연초, 땅속에서 꿈틀대고 있을 봄기운을 흡수하고 싶다면 갤러리 나들이는 어떨까. 에너지 충전소, 혹은 봄으로 가는 정거장 같은 두 전시를 소개한다. 표현 방법은 다르지만 ‘생의 약동’을 붓질의 제스처, 파스텔톤의 캔버스 화면으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온 몸 가득 따스한 봄기운이 스며드는 전시다.
◇박기원 개인전 ‘성장공간’=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313프로젝트 전시장. 높이 6m의 거대한 통유리를 덮은 노란색 ‘비닐 커튼’(작품명 온도)이 안온하게 1층 공간을 감싸고 있다. 겹겹의 얇은 비닐은 외부의 자연광을 투과시키면서 ‘봄의 인큐베이터’ 같은 동화 속 공간을 연출한다. 커튼을 살짝 들치면 바깥은 도심의 삭막한 겨울 도로라는 게 낯설 정도. 귀농 화가 같은 순박한 표정의 박기원(52) 작가는 최근 기자와 만나 “움츠린 겨울을 몰아내고 봄이 약동하는 느낌을 재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비닐 커튼’ 같은 설치 작업처럼 물질성을 통해 공간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던 작가는 이번 전시에선 평면 회화를 보다 강조한다. 2층에 전시된 ‘넓이 시리즈’ 가 그렇다. 살구색, 주황색, 주홍색, 진주홍 등으로 색이 스펙트럼처럼 짙어지는 회화 연작 9점이 진열돼 있다. 2층 전체가 하나의 작품 같다. 회화 작품은 단색 같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무수히 작은 선들을 켜켜이 쌓아서 만들어낸 면이다. 선은 수직으로, 수평으로, 혹은 사선으로 경쾌하게 움직인다. 미세한 선의 율동, 그것을 담아내는 색의 어머니 같은 따스함으로 인해 생명의 약동하는 기운이 전시장을 휘감는다.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참여했던 작가가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 ‘오늘의 작가’ 선정 이후 5년 만에 갖는 개인전이다. 2월 5일까지.
◇이강욱 개인전 ‘역설적 공간: 신세계’=서울 중구 삼청로 아라리오 갤러리 전시장에서도 아지랑이 같은 봄기운이 피어난다. 젊은 추상 회화 작가로는 드물게 스타덤에 오른 이강욱(40)작가의 트레이드마크는 ‘물리학 추상 회화’다. 현미경을 들여다봐야 볼 수 있는 세포, 미립자 같은 이미지와 망원경을 통해서야 관측할 수 있는 거대한 우주의 이미지를 한 화면에 조형적으로 구축했다. 우주 같은 원들이 빙글빙글 이어지고, 세포 다발이 숨어있는 등 꼭 물리학 교과서를 보는 듯 하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7년간 영국 유학의 결과물로 내놓은 신작 ‘제스처’ 시리즈다. ‘미술계의 장동건’으로 불리는 훈남 작가는 “유학 내내 ‘내게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고 말했다. 그는 설치, 조각, 영상도 따라할 수 없는 것이 회화적 제스처라고 봤다. 물감을 칠하고 뿌리고 스펀지로 문지르고 점을 찍는 등 온갖 신체적 행위가 다 들어있다. 이를 통해 레이어(겹)와 톤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캔버스 마다 하나의 고유한 색채 이미지로 다가온다. 노랑, 연두, 파랑, 분홍, 보라…. 파스텔톤 색들에서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면 이는 작품에 숨은 노동행위 때문일 것이다. 제스처는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끝까지 밀어붙인 노동이다. 그래서일까. 캔버스에 찍은 점은 씨앗 같기도 하고 세포막 속의 세포핵 같이 비쳐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 공간, 신세계’다. 송은미술대상(2003) 등 주요 상을 휩쓸던 작가는 2009년 영국으로 떠났다. 2015년 이스트 런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3월 6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갤러리에 핀 봄… 새해 에너지 충전하세요
입력 2016-01-18 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