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본인인증 기술을 개발한 A씨는 지난해 핀테크 회사를 창업했다가 혼쭐이 났다. 기업들은 새로운 보안 기술에 관심을 보이다가도 “공공기관이나 금융기관에서 먼저 채택해야 계약할 수 있다”며 뒤로 물러났다. 금융위가 정부인증 제도를 없애겠다고 발표했지만 현장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공공기관과 금융회사들은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따라야 한다”며 각종 액티브엑스 프로그램을 덧붙여 달라고 요구했다.
A씨는 “금융기관은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의 망 분리 가이드라인을 따라야 하고, 공공기관은 또 국가정보원의 가이드라인를 따라야 한다고 해서 몇 번을 왔다갔다 했는지 모른다”며 “기관마다 수많은 가이드라인과 규제에 얽매여 있고, 가이드라인들이 모두 옛 기술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최신 보안기술을 가진 우리가 오히려 틀에 맞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발표를 믿고 좋은 핀테크 기술만 개발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규제가 많을 줄 몰랐다”고 토로했다.
대표적인 규제가 바로 보안 프로그램 3종 세트라고 불리는 방화벽, 키보드 보안, 백신이다.
“공인인증서도, 방화벽도, 키보드 보안이나 백신도 다 안 깔아도 되도록 하겠습니다. 액티브엑스를 없애겠습니다.”
1년 전 금융위는 새해 업무보고에서 이렇게 밝혔다. 실제 관련 규정도 뜯어고쳤다. 하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의무 규정은 없앴지만, 설치를 금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부 가이드라인만 따르면 보안 책임을 덜 수 있는 관행에 의존해온 금융회사들이 여전히 키보드 보안 프로그램 등을 깔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핀테크 산업 육성을 위해 금융위가 지난해 매달 개최한 핀테크 데모데이에 참가한 업체들도 “현장에선 큰 변화를 실감하기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데모데이에서 만난 한 간편결제 기술 업체 개발자는 정부에 바라는 것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액티브엑스만 없애주면 된다”고 말했다.
해외의 사회적기업을 후원하는 한 비영리 크라우드펀딩 업체 관계자는 “외국 친구들에게 우리 회사 홈페이지를 소개하면, 내용을 보고 후원을 하려다가도 국내 결제 업체가 요구하는 휴대전화 인증이나 본인 인증을 못해 결국 결제를 포기하는 경우가 99%”라며 “어쩔 수 없이 미국의 간편결제 서비스인 페이팔과도 계약을 했는데, 왜 한국은 이렇게 못하느냐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듣는다”고 말했다.
국내 핀테크 산업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망과 기술친화적인 소비자를 모두 갖춘 상황에서도 이런 규제와 관행 때문에 주춤하는 사이 해외 핀테크 업체들은 안방까지 파들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다는 서울 명동의 쇼핑점과 면세점은 중국 알리페이를 대거 도입했다. 한 면세점 관계자는 “중국 관광객이 자기 신용카드나 중국 은행계좌로 간편하게 결제하도록 하려면 국내에선 이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하철 명동역의 담벼락은 ‘한국에서도 알리페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중국어 광고로 도배가 돼 있다. 지난해 면세점을 중심으로 국내에 진출한 알리페이는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의 힘을 앞세워 편의점과 화장품, 식당까지 가맹점을 급속도로 늘리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핀테크 컨설턴트는 “금융위가 실제로 규제를 열심히 없애고 있지만,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장벽은 한 부처가 아니라 범정부적인 대처가 있어야 철폐할 수 있다”며 “그때까진 국내 핀테크 산업의 도약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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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없앴다지만 핀테크 규제 첩첩산중… 개발업체 좌절
입력 2016-01-15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