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흥우] 악마의 속삭임일까 회생의 마중물일까

입력 2016-01-14 17:25

죄다 암울한 소식뿐이다. 북한의 핵도발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태고, 중국발 쇼크로 경제상황 또한 심상찮다. 그렇다고 정치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수록 사람들은 과거의 호시절을 떠올린다. 복고 열풍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상향을 그린 다수의 문학작품이 사회의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미래가 비관적일 때 나왔다는 게 우연은 아니다.

조선의 개혁가 허균은 적서(嫡庶)의 차별과 탐관오리의 횡포가 없는 이상향을 꿈꿨다. 홍길동이 다스린 율도국은 그런 나라였다. 토머스 모어가 꿈꾼 유토피아는 모든 게 평등한 이상향이다. 하루 6시간씩 노동을 하면 그만이다. 노동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태를 막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허균은 신분의 평등만 실현돼도 이상향이라고 여겼고 모어는 물질적 평등은 물론 정신적 평등까지 추구했다. 생산, 소유, 분배 같은 물질적 평등뿐 아니라 교육, 학문, 여가 등의 정신적 평등까지 이뤄져야 유토피아다.

동서양을 관통하는 이상향의 최소 조건은 평등이다. 허균이 환생한다면 적서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국가가 실현됐다고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웬걸, 적서만큼이나 차이가 심한 ‘금수저’ ‘흙수저’ 계급이 새로 생겨났다. 적어도 흙수저를 ‘쇠수저’ 정도로는 올려놔야 미래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게 복지다. 선진국들이 일찍이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외친 이유이기도 하다.

386조원 규모의 올해 예산에서 복지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31%에 이른다. 남북이 대치해 막대한 국방비를 부담해야 하는 우리 여건에서 복지예산을 마냥 늘리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면 복지 확대는 불가능한가. 누리과정을 둘러싼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폭탄 돌리기를 보면 분명 지난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채 1라운드가 끝나기도 전에 서울·성남발 ‘야당표’ 복지로, 복지전쟁 2라운드 막이 올랐다. 2라운드는 1라운드와 양상이 사뭇 다르다. 지자체에선 하겠다는데 중앙정부는 하지 말란다. 박근혜 대통령은 13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서울시의 청년수당과 성남시의 3대 무상복지를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다. 지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사업을 마구잡이로 하면 결국 국가의 부담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했다.

서울시 청년수당과 성남시 3대 무상복지에 들어가는 예산은 각각 90억원, 194억원(무상산후조리 56억원·무상교복 25억원·청년배당 113억원)으로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0.0003%, 0.008%다. 지자체는 사회보장제도를 신설하거나 변경하려면 보건복지부와 협의를 거쳐야 하는데 정부가 제동을 걸면서 양측의 마찰은 결국 법정싸움으로 번졌다.

관건은 재원 마련에 달려 있다. 전시성 사업을 없애고 불요불급한 예산을 줄이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서울과 성남시의 입장이다. 성남시는 이재명 시장 취임 이후 수천억원의 부채를 갚았고, 지난해 행정자치부의 2014년도 재정 분석에서 건전성 분야 최우수 평가를 받았다. 청년수당 등이 ‘N포세대’ 청년들에게 패자부활의 마중물 역할을 한다면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퍼주기식 복지는 지양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청사를 호화롭게 치장할 예산을 사회적 약자를 위해 쓰겠다면 오히려 장려해야 할 일이다. 박 대통령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청·장년층을 위해 월 30만∼50만원의 취업활동 수당 지급을 추진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