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의전(儀典)’은 영어로 ‘프로토콜(protocol)’로 번역된다. 비잔틴 제국에서 쓰이던 중세 그리스어 ‘protokollen’에서 유래한 말로, ‘맨 처음’을 뜻하는 ‘proto’와 ‘붙이다’라는 뜻의 ‘kollen’이 합성된 단어다. 원래는 공증 문서의 효력을 나타내고자 맨 앞장에 붙이는 종이를 의미했으나 이후 외교관계를 담당하는 정부의 공식문서나 외교문서 양식을 의미하게 됐다.
현대적인 의전이 확립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7세기 프랑스 루이 14세의 궁중 예절에서 그 단초가 마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과 같은 외교 의전이 확립된 건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직후로, 전후 처리를 위해 1815년 열린 빈회의에서 외교관의 직위 등 국가 간 외교 관례의 형식이 체계화됐다.
◇국빈·공식·실무방문… 정상 행사의 ‘격(格)’은?=우리 정상이 해외에 가거나 타국 정상이 방한했을 때 항상 ‘국빈방문’ ‘공식방문’ 등의 말이 따라붙는다. 행사의 격을 의미하는 말로, 우리 정부는 방문하는 ‘외빈의 격’과 ‘접수의 격’에 따라 예우 수준을 차등해 제공한다. 외빈의 격은 ‘국가원수’ ‘A급 총리(행정수반인 총리)’ ‘B급 총리(행정수반이 아닌 총리 및 부통령, 왕세자)’ ‘외교장관’으로, 접수의 격은 ‘국빈방문(State visit)’ ‘공식방문(Official visit)’ ‘실무방문(Working visit)’ ‘사적방문(Private visit)’ 등으로 구분된다.
격이 가장 높은 건 국빈방문이다. 우리 대통령이 외국의 국가원수 또는 A급 총리를 공식 초청해 방한하는 경우를 말한다. 외빈이 우리 공항에 도착했을 시 도열병 20명을 배치하고 예포 21발을 쏘는 등 최고의 예우가 제공된다. 또 외빈 체류기간 동안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에서 근접경호를 진행하며 차량 이동 때는 교통이 통제되고 경찰청 사이드카가 호위한다. 청와대 공식환영식과 공식만찬 외에 각종 연회와 문화공연도 열린다. 예우가 각별한 만큼 우리 대통령 임기 중 나라별로 한 번만 받되, 해당 국가의 국가원수가 재선되거나 바뀌었을 경우에는 재차 접수가 가능하다.
공식방문의 대상은 국가원수와 A급 총리 외에도 B급 총리 등이 포함된다. 예포 등은 생략되며 공식 환영식은 청와대가 아닌 서울공항에서 열린다. 실무방문은 공식 초청은 없으나 공무 목적으로 외빈이 방한한 경우를 말한다. 도열병과 예포 발사, 청와대 공식환영식 등 각종 행사가 생략된다. 또 우리 정상과 접견할 경우도 격이 회담이 아닌 환담이 된다.
◇세계 정상이 모이면 서열은 어떻게 정할까… 다자회의와 의전=구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된 이후 국제사회에서 세계화·지역화 추세가 날로 뚜렷해지고 있다. 전통적인 양자 외교와 더불어 다자 외교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다. 특히 최근 대두된 이슬람국가(IS) 등 테러리즘에 대처하기 위한 글로벌 협력 움직임도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문제는 다자 외교 행사의 의전이다. 다자회의 특성상 여러 국가의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일 경우 회의장 출입인원이 제한되는 등 의전상 제약이 많기 때문에 각국 의전관들은 양자 행사 때보다 더욱 자국 정상에 대한 예우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주최국 역시 자국 정상을 더 예우해 달라는 각국의 빗발치는 요청에 고심에 빠진다. 모든 국가의 정상들이 만족할 만한 의전을 제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수 국가 정상이 참석하는 행사에서 서열은 원칙적으로 국가원수, 정부 수반의 순서로 정한다. 또 같은 국가원수인 경우 재임기간 순으로 서열을 매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 형식이 정형화된 행사의 경우 회의장 도착과 좌석 배치는 각국 영문명의 알파벳순으로 정하며 회의장 출발 순서는 반대로 알파벳 역순으로 한다.
좌석배치 외에도 신경 쓸 건 더 있다. 정상들이 타고 오는 특별기의 출발·도착시간 배분, 숙소 배정, 회의장 및 연회 좌석 배치, 단체사진 촬영 위치, 공동선언문 발표 시 위치 등이 주로 관심 대상이다.
특별기의 경우 각국 정상들이 너무 이르거나 늦은 시간에 도착하는 걸 꺼려 특정 시간에 신청이 몰리지만 주최국 입장에서 공항 사정과 민간 항공기 일정 등을 고려하면 모두 받아주기가 어렵다. 연회 좌석 배치는 더욱 까다롭다. 테이블 끝이나 창을 등지고 앉는 자리는 의전상 좋지 않은 자리여서 해당국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때문에 통상적으로 좌석 배치에 대해선 마지막 순간까지 참석자들에게 알리지 않는 게 관행으로 굳어졌다. 미리 공개하면 “자리를 바꿔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기 때문이다.
◇외교무대의 ‘투명인간’, 통역사=외교 행사에서 정상이나 대표들은 모두 자국어를 사용해 의사소통을 한다. 자국 문화를 존중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상대국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경우도 자국어를 쓰는데, 통역이 진행되는 동안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 간 의전행사에서 사용되는 통역 방법은 ‘순차통역’ ‘동시통역’ ‘근접통역’ ‘이중통역’ 등 네 가지다. 순차통역은 정상 간 행사에서 주로 쓰인다. 정상이 발언하는 동안 노트에 내용을 기록해뒀다가 통역사 자신이 마치 정상이 된 듯 1인칭으로 통역을 한다. “대통령님은 ‘∼∼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가 아닌 “나는 ∼∼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식이다. 정상은 통역사를 배려하기 위해 1분 내외로 말을 끊지만 종종 이를 잊는 경우에는 3∼4분 넘게 말이 이어지기도 한다. 통역사의 기억력이 중요한 이유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도 순차통역을 사용한다. 민감한 사안인 탓에 단어 하나하나를 제대로 통역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남북은 물론 미·중·러·일이 참여하는 6자회담이 열리면 무려 24명의 통역사가 동원된다. 남북 간에는 별도의 통역사가 필요 없지만 나머지 4개국은 남한과 북한에 각각 전담 통역사를 배정한다.
동시통역은 국제회의에서 주로 이용된다. 통역시간을 줄이고자 각 통역사들이 부스에 모여앉아 각 언어로 동시통역을 하며 회의 참석자들은 헤드셋을 착용해 발언 내용을 듣는다. 2009년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유엔에서 연설할 당시 제한시간 15분을 훨씬 넘긴 96분간 ‘막말’을 쏟아낸 적이 있는데 당시 통역사가 카다피의 발언이 끝난 뒤 ‘탈진’ 상태에 빠졌다는 웃지 못할 후일담이 전해진다.
근접통역은 오·만찬 등 다소 편안한 분위기의 행사 때 이용된다. 한 정상이 발언을 하면 각국 정상 곁에 근접한 통역사들이 귓속말로 통역을 해주는 형태다. 이중통역은 통역사를 구하기 힘든 소수 언어권 정상과의 소통 때 쓰이는데, 주로 영어를 매개어로 사용한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시 황제’도 국빈 아니면 이 대접 못 받는다… 儀典의 막전막후
입력 2016-01-16 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