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위원회가 지난 연말로 활동시한이 종료돼 해체됐다. 마지막 위원장으로 만 4년간 재임했던 박인환(63) 위원장을 12일 국민일보 회의실에서 만나 소회를 들었다. 그는 짙은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일본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팩트(역사적 사실)의 힘’이므로 진상조사가 계속돼야 한다고 밝혔다. 희생자들의 아픔을 부족하나마 보상하고 유해를 조국으로 송환하는 일은 국가의 의무이자 품격을 높이는 일인 만큼 위원회가 사라지더라도 지속돼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먼저 화제에 오른 것은 지난 28일 한·일 외교장관이 발표했던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합의였다.
-위안부 합의에 대해 전문가로서 평가한다면.
“개인적으로 발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베 신조 정권으로부터 받아내기 불가능해 보였던 요구들이 포함돼 있었다. 일본이 당시 군의 관여를 인정했는데 전쟁 중 내각은 이름뿐이고 실제 국가를 대표하는 것은 군이다. 따라서 군의 관여를 시인한 것은 정부 책임을 시인한 것과 같다. 일본 관헌에 의한 강제동원을 줄곧 부인해온 아베 내각의 기존 입장과 비교할 때 놀랄 만한 진전이다. 또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고 총리가 사죄, 반성을 표명했다. 법적 책임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빠졌다는 비판이 있지만 가해자가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책임지겠다고 한 게 중요하다. 가해자가 반성문을 쓴 것 자체가 중요하지 문구가 진실하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부차적 문제다.”
-최종적, 불가역적 표현에 대한 비판이 많다.
“최종적이란 표현은 일본이 요구했고, 불가역적은 우리 정부가 강력히 주장해서 넣은 것으로 안다. 최종적이라는 것은 같은 말을 되풀이 않는다는 뜻이다. 불가역성은 일본이 사죄, 인정을 번복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최종적, 불가역적은 일본의 사죄 반성 조치 등이 이행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외교부의 초기 설명이 미흡했던 것으로 보인다.”
-10억엔 일본 정부 기금은.
“2011년 우리 정부가 한일청구권 문제와 관련해 입장을 발표하면서 소모적 법적 논쟁 방지와 도덕적 우위 관점에서 정부 차원의 금전 배상을 요구하지 않고, 진상규명은 철저히 하겠다고 했는데 이번에 왜 기금 부분이 두드러지게 됐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기금 운영을 우리 정부가 맡도록 한 부분도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 정부의 운신 폭이 좁아지게 됐고 예상되는 여러 기술적 문제들이 정부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 예컨대 10억엔 기금을 피해 할머니들에게 나눠드린다면 생존자에게만 적용할 것인지 사망자까지 소급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기금을 다 쓰게 되면 재단을 폐지해야 하는 것인지도 어려운 문제다. 독일의 경우 과거사 청산을 위한 EVZ재단이 가해국에 있기 때문에 폐지되지 않고 영속하는 것이다. 피해 조사는 폴란드 등 피해 각국이 하되 독일이 이들 조사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자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의 사전소통 미흡 문제는.
“일본의 사죄·반성·책임은 할머니들이 바라던 것이다. 금전 부분은 굳이 물어볼 사안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한국의 상황을 감안하면 사전 절차가 미비했다. 사전에 소통했더라도 진전이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배상금 부분은 미리 할머니들과 얘기해서 일본 측에 ‘필요없다더라’고 전할 수 있었다면 가장 좋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외교적 합의란 게 모두 만족할 수는 없다.”
-그간 위원회 활동을 평가한다면.
“피해 신고 22만6000건을 접수해 조사를 실시했다. 이 가운데 11만5000건에 대해 지원 여부를 심사, 7만여건에 6200억원을 지원했다. 연간 100억원쯤 되는데 우리 경제 규모에 비춰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다. 또 강제동원 피해 가정의 경우 대부분이 차상위계층이어서 이들에 대한 지원이 복지의 기능도 했다. 행정자치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70년 전 일에 예산 낭비를 한 것으로만 보지 않는다.”
-4년간 위원장으로 재임한 소회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던 어두운 역사를 정부의 힘으로 조사해 늦게나마 조사 자료 34만건을 축적했다. 이는 국격의 상징인 동시에 일본의 발뺌을 막는 실체의 역할을 할 것이다. 수장고가 없어 이들 빅데이터를 지하 6층 주차장을 빌려 저장해뒀다. 일본 민주당 정권 시절 의원 25명이 찾아와 수장고를 보더니 눈이 동그레졌다. 피해 신고만 하면 인정되는 게 아니라 기각률이 30% 이상이라는 얘기를 해줬더니 이후 유해 봉안이나 자료 확인 등에 협조를 해줬다. 팩트의 힘이라고 본다. 우리는 광복 후 3년간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고 6·25까지 겪으면서 일제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다. 강제동원 진상 규명을 위해서는 일본의 자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돈이 아니라 진실을 찾겠다면 일본의 양심적 인사들이 움직인다. 일본의 양심을 움직이려면 소녀상보다 피해자료 축적이 효과적이다.”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가미카제 특공대의 일원이어서 친일파로 분류됐던 인물의 유족이 강제동원 피해 신고를 했다. 조사해 봤더니 연희전문대에 다니다 1944년 징용됐다. 똑똑하고 신체 건강하니 공군에 차출됐다가 가미카제 일원이 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것이다. 위원회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표결 끝에 강제동원 피해자로 결정했다. 유족들이 친일파 누명을 벗었다면서 눈물을 지었다. 우리나라 근대사 연구는 과거에는 독립운동사에, 민주화 이후에는 친일파 규명에 쏠려 있다. 강제동원자가 200만명이라면 3∼4가구에 장정 한 명꼴이다. 일제강점 역사는 1%가 독립운동, 다른 1%가 친일이며 98%는 민초들의 슬픈 역사다. 강제동원 진실규명은 민초들을 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와의 화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예로 전범 재판에서 조선인 20여명이 B, C급 전범으로 선고받아 사형당했다. 유족들은 강제동원 피해자라고 진술했다. 조사해 보니 대부분 포로수용소 감시원이었다. 일본에 의해 모집돼 일본인 밑에서 활동하다 연합국 포로들의 가혹행위 진술에 따라 재판받은 경우였다. 사형당할 정도의 전범은 아니었다고 본다.”
-위원회 활동시한이 연장되지 않은 이유는.
“위원회 통폐합을 통한 정부조직 효율화와 예산 절감이 표면적 명분이다. 하지만 위원회가 노무현정부 시절 과거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출범한 것도 원인 중 하나다.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최근 분위기와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밝고 자랑스러운 것만이 아니라 어두운 것도 역사다.”
-행자부로 업무가 이관돼 전문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는데.
“위원회 80명 가운데 40명이 공무원이고 40명이 민간 조사관이다. 공무원들은 순환보직 때문에 금방 떠나 전문성이 축적되지 않는다. 당초 위원회를 총리실 산하 독립적 조직으로 만든 것은 전문성을 위해서였다. 국내 과거사 문제를 다루는 행자부 과거사지원단 산하에 담당 과를 만든다는데 일제 피해 문제가 엉뚱하게 이념 문제에 휘말리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특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유해송환 문제다. 나라 잃고 떠돌다 숨진 이들을 조국에 모시는 것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상징하는 문제이자 국격의 문제다. 노무현정부 당시 일본에 안치돼 있던 군인 및 군무원 423위를 송환키로 합의했고 일반인 2700위도 위원회가 찾아내 송환하기로 했지만 아베 정권 들어 전면 중단됐다. 러시아 정부와 2012년 협정을 맺은 사할린 유해 송환도 중단된다면 러시아 측에서 우리나라를 우습게 볼 것이다.”
-강제동원 피해기록물 유네스코 등재는 어떻게 되나.
“위안부 합의 이후 여성가족부에서 위안부 기록 등재를 주저하는 움직임이 있는 듯하다. 강제동원 중 가장 심각한 부분이 위안부 문제인데 다른 강제동원 기록물 등재도 영향을 받지 않을까 우려된다. 중국이 난징학살자료를 등재했듯 강제동원 자료는 반드시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해야 한다. 국가기록원으로 넘기면 분류 등에 많은 시간이 걸려 결과적으로 사장된다. 유대인 학살의 경우처럼 기록물을 세계와 공유하고 다양한 문화·역사 콘텐츠로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일본의 역사 왜곡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방안이 된다.”
-한·일 관계 해법은.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는다(Forgivable but Unforgettable)는 경구가 있다. 용서를 하려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일본도 승복한다. 진상조사는 마땅히 계속돼야 한다. 2013년 난징학살기념관을 방문했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출구 앞에 신고서 양식이 비치돼 있었다. 80년 전 사건인데 한 사람의 신고라도 있으면 지금이라도 조사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독일이 과거사 정리에 모범적인 것은 일본보다 착해서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할 일을 제대로 하기 때문이다.”
박인환은 누구…
검사 출신으로 변호사를 거쳐 2006년부터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2년 1월부터 대일항쟁기 피해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올 초 교단에 복귀했다.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상임대표를 지냈고 국민권익위원회 전신인 부패방지위원회 초창기에도 간여하는 등 반(反)부패 활동을 한 공로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대학시절 흥사단에서 민족주의 활동을 하면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경북 의성(63) △대구 대륜고, 성균관대 법대 △사법시험 26회, 사법연수원 16기 △87∼95년 서울중앙지검 등 검사 △95∼2006년 법무법인 한중 등 변호사 △법률신문 논설위원 겸 편집위원,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조정위원, 한국소비자보호원 분쟁조정위원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위원회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2010년 3월 22일 발족한 총리실 산하 행정기관이다. 2004년과 2008년 각각 설립된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위원회’와 ‘국외강제동원희생자지원위원회’를 통합해 일제 강제동원의 진상을 규명하고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출범했다. 차관급 위원장을 필두로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 한시 기구로 5차례 기한이 연장됐다가 2015년 12월 말로 폐지됐다.
활동기간 중 22만6000건의 강제동원 피해신고를 받아 조사해 7만여건에 대해 6200억원을 지원했다. 해외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 및 수습·봉환도 추진했다. 지난해 12월 부산에 6층 규모의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건립했다.
김의구 부국장 egkim@kmib.co.kr
[데스크 직격 인터뷰-박인환 강제동원 조사위원장] “팩트가 힘… 34만건의 피해자료 日 발뺌 막아줄 것”
입력 2016-01-15 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