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손수호] ‘평화의 소녀상’의 운명

입력 2016-01-12 17:35

기자 시절부터 미술조형물에 관심이 많았다. 회화가 특정 그룹의 취향인 데 비해 공공미술은 사회일반의 가치를 반영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물과 장소의 선택, 작품의 형태에서 시대의 지향점, 심미안까지 드러낸다. 동서고금에 통용되는 조형물의 가치는 해외 출장길에서 두루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단 하나 예외가 있었으니, 북유럽 국가였다. 오슬로의 노르웨이 왕궁 앞에 세워진 기마상의 주인공이 스웨덴 황제 칼 요한이라는 설명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중앙역에서 왕궁으로 이어지는 길 이름이 아예 칼 요한 거리다. 핀란드 헬싱키 도심에 자리한 원로원 광장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이 서 있다.

이 유별난 장면은 노르딕 역사의 특성과 연관이 깊다.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는 같은 바이킹족의 후예에다 에다(Edda) 신화를 공유하고 있다. 언어와 문화도 비슷하다. 긴장의 시기가 있긴 해도 공유의 역사가 더 길고 깊다. 이웃끼리 병탄과 복속의 관계가 아니라 국제정세와 왕실의 혼맥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정도였다. 칼 요한도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한솥밥을 먹던 시기에 두 나라의 왕이었다. 핀란드는 강국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끼어 있다 보니 눈칫밥 9단이다. 독립 이후 알렉산드르 2세 동상의 철거론이 나왔으나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며 존치시켰다. 노르딕 국가들은 지금도 동맹에 버금가는 유대를 맺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달리 동북아시아에서는 공존보다 정복의 역사가 펼쳐졌다. 먹고 먹히는 그 야만의 시대에 천인공노할 전쟁범죄가 저질러졌다.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은 이 과정에서 희생당한 위안부의 삶을 담고 있다. 할머니들의 쓰디 쓴 삶을 이토록 정결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소녀는 그리 예쁘지도 않아 낮은 코에 가는 눈, 단발머리 행색이다. 우물가에서 만나는 이웃집 딸 같다. 그러나 강단이 있다. 도드라진 광대뼈에서 의지를, 꽉 쥔 주먹과 깡 다문 입술에서 분노를, 살짝 든 까치발에서 심지를 읽을 수 있다.

장소도 광장이나 공원이 아니라 이면도로 좁은 길이다. 그곳에서 소녀상은 자신들을 전장으로 내몬 나라의 국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뿐이다. 영웅의 동상처럼 숭배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껴안고 아픔을 나누는 공감의 아이콘이다.

장소를 옮기는 순간 의미가 사라진다. 당초 ‘평화비’라는 모호한 이름을 달고 출발한 조형물에 필자가 ‘평화의 소녀상’으로 명명한 것도 최고의 공공미술에 대한 경의 표시였다.

소녀는 힘이 셌다. 그동안 일본은 녹음기를 틀 듯 위안부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인하다가 소녀상이 세계 곳곳에 들어서 반인륜범죄를 상기시키는 매체로 작용하자 화들짝 놀랐다. 자신들도 원폭으로 인한 전쟁의 피해자라는 논리를 전파하는데 골몰하던 그들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본은 위안부의 존재가 서방 각 나라로 확산되자 외교력을 동원해 저지에 나섰다. 실제로 일부 국가에서는 일본대사관의 조직적인 방해로 소녀상 건립이 무산되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의 강물은 굽이굽이 바다로 흐른다.

소녀상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 흐름을 돈으로 막으려는 시도다. 내각총리의 이름으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피해의 상징물을 치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용렬한 나라의 옹졸한 발상이다. 웨스트민스터 광장의 간디처럼 소녀상을 일본 국회의사당에 세울 용기가 없다면 침묵하는 것이 그나마 미덕이다. 정부 간 협상으로 10억엔이 오든 오지 않든, 소녀는 꿋꿋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침략의 역사를 지울 수 없는 것처럼 소녀상은 지나간 과오를 일깨우는 이정표로 길이길이 남겨야 한다.

손수호 (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