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0억 낭비’ 강영원 무죄 선고에 “뭐가 더 있어야 배임 되나”… 검찰 2인자, 법원 공개 비판

입력 2016-01-12 04:03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 11일 서울고검 기자실에서 강영원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의 무죄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힌 뒤 자리를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이영렬(57) 서울중앙지검장이 수천억원대 국고 손실 혐의로 기소된 강영원(65)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의 1심 무죄 판결을 두고 법원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11일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열어 “단호하게 항소해서 판결의 부당성을 다툴 것”이라고 밝혔다. “공중으로 날아간 천문학적 세금은 누가 책임지느냐” “회사 경영을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말인가”라며 강도 높은 불만을 터뜨렸다.

‘검찰 2인자’로 불리는 서울중앙지검장이 개별 사건의 판결에 대해 사법부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은 전례가 없다. 이번 기자회견은 법원의 배임죄(背任罪) 처벌기준 완화 경향을 지적해 여론을 환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특별수사 역량 강화를 추진하는 검찰은 재계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배임죄 처벌 완화’ 기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경제 활성화를 위한 부패 척결 필요성을 언급한 것과 무관치 않은 기자회견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배임죄 입증, 뭐가 더 필요한가”

지난 8일 밤, 이 지검장은 강 전 사장의 무죄 판결문을 받아본 뒤 “납득할 수 없다”고 격노한 것으로 전해졌다. 강 전 사장은 2009년 10월 캐나다 석유회사인 하베스트 등을 시장가격보다 5500억원 비싼 가격에 인수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재판부는 고의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무죄 석방했다. 막대한 국고가 손실됐지만 법적 처벌을 받는 이는 아무도 없게 된 셈이었다.

이 지검장은 지난 주말 노승권(50) 1차장, 주임검사인 임관혁(49) 특수1부장 등을 불러 대책회의를 했다. 부실 자원외교의 대표 사례인 데다 피해 규모가 1조원을 넘는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검찰의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뜻이 모아졌다. 검찰 관계자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된 점을 검찰 내부에서 심각한 사안으로 파악했다”고 말했다.

대검찰청과의 의견 조율 이후 카메라 앞에 선 이 지검장은 석유공사의 하베스트 인수는 ‘묻지마’ ‘졸속’ 경영의 전형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강 전 사장에게는 부실한 경영평가를 만회하려는 사적 동기가 있었고, 세밀한 검증절차 없이 이사회 허위보고와 함께 3일 만에 인수계약을 체결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국민의 이름으로 기소했다”는 게 이 지검장의 주장이다. 그는 “이 이상으로 무엇이 더 있어야 배임이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전례 없는 비판’ 속내는

강 전 사장은 부실 인수에 대해 감사원 조사를 받을 때부터 “손실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손실액 범위를 산정하는 문제였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강 전 사장 스스로 손실 예상 사실을 자인했다고 보고, 배임의 고의성 역시 자연히 인정될 것으로 판단했다. 검찰 관계자는 “이게 무죄라면 앞으로 기업 인수·합병(M&A)에서 유죄가 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형사범죄 중 가장 모호한 규정’이라는 평가를 받는 배임죄를 둘러싸고 검찰과 법원이 이견을 보인 건 처음이 아니다. 이석채 전 KT 회장, 강덕수 전 STX 회장 등 굵직한 경제인 재판에서 검찰이 내세운 배임 혐의는 대부분 인정받지 못했다. 이때마다 검찰은 “법원이 따지는 배임의 고의 및 동기 판단 기준이 지나치게 까다롭다”며 반발했다. 반면 재계는 “배임죄는 검찰의 자의적 판단”이라거나 “자율성이 존중돼야 할 경영활동이 위축된다”는 논리를 펴며 아예 배임죄를 없애자는 반응을 보였다.

검찰은 기업 경영활동에 대한 형사적 개입을 문제시하는 이런 주장을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이대로라면 경제범죄에 대한 수사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숨기지 않는다.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이 출범하는 등 박근혜정부 4년차를 맞아 부패사정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배임 무죄’가 빈번해지면 검찰 입장에서 큰 부담이다. 이 지검장은 “경영 판단을 지나치게 폭넓게 해석하기 시작하면 책임자에게 면죄부를 주게 된다”며 “그나마 유일하게 존재하는 ‘검찰 수사를 통한 사후 통제’를 질식시키는 결과가 된다”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법원은 “법정 밖의 비판에 대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비공식적으로 이 지검장의 공개 비판을 불쾌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법정에서 해야 할 이야기를 사건 당사자가 언론에 대고 발언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이경원 양민철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