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가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영화 ‘헤이트풀 8’. 뜻을 풀이하자면 ‘증오의 8인’쯤 된다. 그러나 도대체 등장인물이 누구 혹은 무엇을 증오한다는 건지, 나아가 과연 증오를 품고 있기나 한 건지 전혀 알 수 없다. 서로 마구 총을 쏴대기는 하지만 ‘증오’와는 상관없다.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을 뿐.
타란티노의 8번째 작품이라는 이 영화는 한마디로 본인의 전작들을 짜깁기해놓은 자가복제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이전 논문을 새 논문인 양 복제해 발표하기 예사인 어떤 나라 학자들과 동류(同類)라고나 할까. 그러나 내 관심은 타란티노라는 B급 감독을 평하는 데 있지 않다. 다른 쪽에 있다. 바로 ‘whodunnit’ 또는 ‘cloak and dagger(망토와 단검)’라고도 통칭되는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천착이다.
‘헤이트풀 8’은 무대 배경이 폭설에 갇혀 고립된 와이오밍의 외딴 잡화점 겸 여행자 숙소다. 여기 8명의 인물이 모여 두 명이 독살당하고 나머지는 유혈 낭자한 총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총싸움이 벌어지기 전까지 영화는 살짝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극을 연상케 한다. 폭설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서 살인이 발생한다는, 설정이 동일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이나 연극 ‘쥐덫’을 떠올리게 하는 것.
물론 ‘피칠갑의 달인’ 타란티노에게 ‘고급 취향’의 추리영화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로 연상된 훌륭한 미스터리 영화에 대한 갈증은 어쩔 수 없다. 존 휴스턴의 ‘말타의 매’(1941, 험프리 보가트)나 빌리 와일더의 ‘검찰측 증인’(1957, 말렌 디트리히),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1974, 잭 니콜슨), 시드니 루멧의 ‘오리엔트 특급∼’(1974, 앨버트 피니)처럼 훌륭한 배우들을 써서 멋진 미스터리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은 이젠 없는 걸까. 단세포적인 볼거리에만 치중한 영화가 판치는 요즘 두뇌를 자극하는 품격 있는 멋진 추리영화가 보고 싶다.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
[영화이야기] (53) 추리영화 불모시대
입력 2016-01-11 17:34 수정 2016-01-12 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