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하형록 <7> 대학 때 주 30시간씩 일해 학비 벌고 건축도 배워

입력 2016-01-11 17:28 수정 2016-01-11 20:50
1980년대 초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건축과를 졸업한 하형록 회장이 졸업식장에서 꽃을 받고 기뻐하고 있다.

아버지는 탁월한 설교자였지만 이곳은 미국이었고 당시는 한인이 많지 않던 때라 교회 개척 후에도 우리 집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덕분에 형과 나는 공부하면서 일을 해야 했다.

미국은 여름방학이 길어서 거의 석 달가량 됐다. 학생들은 일을 해서 1년 공부할 돈을 모으곤 했다. 나도 열세 살 무렵부터 여름방학에 일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이 아버지와 야간 청소를 하거나 페인트칠을 하는 것이었다. 보통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온 종일 페인트칠을 했는데 실내 페인트는 그나마 쉬웠다. 하지만 돈 벌이가 안 됐다. 반면에 건물 밖 페인트칠은 힘은 들었지만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외부 페인트칠을 하려면 사다리를 놓고 건물 꼭대기 층에서부터 기존의 페인트를 깨끗이 벗겨내야 하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얼굴이 페인트껍질로 뒤범벅되도록 반나절 이상을 벗겨내야 했다.

그러다가 독립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열여섯 살이 되면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지 않고 노인케어센터에서 청소하고 빨래를 수거하는 일을 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어느 미국인 교회의 부목사로 가신 뒤에는 그 교회 청소일도 했다. 대학에 들어간 뒤로는 학교 건축부에서 일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당시 직장인들이 보통 주당 40시간 일을 했는데 나는 주중에만 하루 4시간씩 20시간 일했다. 주말에 일 한 것까지 합하면 30시간이 넘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한 일이지만 대학에서 일할 때는 건축과 관련해 상당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사실 어릴 때 나의 꿈은 비행기 조종사였다. 그 꿈은 두 살 때부터 품은 것이다. 비행기 장난감을 보면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장난감 비행기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대신에 직접 나무로 비행기를 만들어 고무줄로 당기면서 놀았다. 이 꿈은 고등학교 때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비행기 조종사는 한번 집을 떠나면 최소 1∼2주는 집에 돌아오기 어렵다’면서 그래도 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는데 그 순간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떤 경우라도 가족을 떠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언어 장벽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영어를 제대로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미국에서 말로는 도저히 먹고살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이웃에 사는 한인이 “동양인은 기술을 배우는 게 좋다”는 말을 듣고 건축 관련 쪽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미국의 시장 경제 사정이 너무 안 좋아 직장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가정부에 삯바느질까지 하며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누구보다 빨리 취직해야 했다. 어머니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어린 마음에도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나는 3년제 고등학교도 2년 만에 마치고 4년제 대학도 3년 반 만에 끝냈다. 구조공학 분야 자격증도 남들보다 4∼5년 빨리 취득했다. 이후 건축 디자이너 자격증도 땄다.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은 무조건 붙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즈음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하던 곳이 있었는데 바로 원자력발전소였다. 거기에 취직해 몇 년간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발전소가 어려워져서 그만두고 칼 워커 회장이 창업한 주차건물 전문 건축회사인 워커 파킹 컨설턴트에 입사하게 됐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