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의료분야 개척자, 로제타 셔우드 홀] 자신의 피부를 조선 소녀 환자에 이식해주다

입력 2016-01-11 20:47
로제타는 막막하고 두려울 때마다 시편을 읽으며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가 한국 선교사로 일하며 읽었던 성경(왼쪽). 로제타 일기에 나오는 보구여관(1890년 10월 15일) 모습. 하희정 박사 제공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서 일하라

뉴욕 빈민가 무료진료소에서 인턴 과정을 밟던 로제타는 어느 날 우연히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서 발행하는 책자를 읽게 되었다. 짧은 연설문 하나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미국의 첫 여자대학인 마운트홀리요크 여자신학교를 세운 메리 라이언의 글이었다.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라.” 그는 기독교의 봉사정신으로 해외선교에 나서 줄 것을 호소했다. 가슴 한쪽에 묻어두었던 오랜 꿈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해외 선교를 자원했고, 원래 희망하던 중국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배정받았다. 그 순간부터 조선은 그의 사랑이 되었다.

두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준비해온 선택이 아니었기에 낯선 땅에 대한 불안감은 더 컸다. 여행 첫날 일기에 그는 이렇게 썼다. “지금 나는 내가 전혀 모르는 언어를 쓰는 낯선 사람들에게로 간다. 하지만 ‘사랑은 보편 언어’라 했고 무엇보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

막막하고 두려운 마음이 일 때마다 시편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조선인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불교에 관한 책도 틈틈이 읽었다. 동양종교라면 무조건 미신이나 우상숭배로 폄하하던 대부분의 선교사들과는 분명히 다른 시각이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처음 눈에 들어왔을 때의 감동을 로제타는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조선 사람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때는 자신이 조선의 흰옷을 평생 사랑하게 될 줄 몰랐다. 조선 여성들은 해가 질 때까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피부를 떼어 수술한 여의사

로제타가 조선에 온 ‘1호’ 여의사는 아니다. 조선 여성들이 서양 의사에게 처음 진료를 받은 것은 5년 전이었다. 1885년 9월 감리교 개척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이 정동에 진료소를 열었다. 하지만 여성은 전체의 20%에 불과했다. ‘여자는 외간 남자에게 몸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오랜 관습이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메리 스크랜턴은 여의사를 요청했고, 2년 후 여의사 메타 하워드가 조선에 왔다.

조선 여성들은 그제야 마음 놓고 병원을 찾았다. 진료 건수가 열다섯 배까지 늘었다. 명성황후도 첫 여성병원이 세워진 것을 기뻐하며 ‘보구여관’(여성을 보호하고 구해주는 곳)이라는 의미 있는 이름을 선물했다. 하지만 하워드는 건강을 잃고 2년 만에 귀국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장로교도 1886년부터 애니 엘러스에 이어 릴리어스 호턴을 제중원 부인과에 투입해 진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왕비의 주치의였고, 제중원도 왕실과 귀족들을 주로 치료하던 병원이었던 만큼 일반 여성들이 접근하기는 어려웠다.

로제타는 짐을 푼 다음 날부터 보구여관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그가 마주한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환자와의 소통은 거의 불가능했다. 도와줄 간호사가 없어 진료 순서를 정하는 일부터 약을 나누어주는 일까지 도맡으며 온갖 환자들과 씨름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들을 통해 로제타는 사랑이야말로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보편 언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달이 되어갈 무렵, 첫 피부 이식수술을 했다. 열다섯 살 된 예쁜 소녀가 병원을 찾았는데, 어릴 때 입은 화상으로 손가락 세 개가 손바닥과 붙어 있었다. 소녀는 혼기가 찼으나 결혼을 하지 못했고, 가족들은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그의 고통을 헤아린 로제타는 손가락 분리 수술을 하고, 환자의 팔에서 피부를 떼어 군데군데 피부가 없는 부분을 메우는 자가 이식수술을 시도했다.

조선에서 피부 이식은 상상할 수 없었다. 통역을 통해 아무리 설명해도 환자는 이해하지 못했고 피부를 떼어내는 것에 큰 두려움을 가졌다. 로제타는 자신의 팔에서 피부를 떼어내 소녀에게 이식하기 시작했다. 이화학당 말썽꾸러기 소녀가 이에 감동하여 자신의 피부를 기증했다. 다른 여선교사들도 자신의 피부를 떼어 주었다. 그제야 환자도 그의 오빠도 두려움을 물리치고 자신의 피부를 내놓았다. 소녀의 어머니는 너무 고마워 로제타에게 자기 살점을 도려내 혈서로 쓴 감사편지를 건넸다.

이 일은 36년 후 한국인들이 마련한 로제타의 환갑잔치에서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한국인들에게는 ‘정’이라는 마음 깊은 사랑이 있었다. 로제타는 그 정에 늘 감동했다. “조선인들은 매우 예의가 바른 사람들이어서 어떤 도움을 받으면 어떤 식으로든 꼭 은혜를 갚으려고 애쓴다.”

한국인의 정을 뛰어넘은 기독교적 이타심

대학 교육을 받은 서양 의사가 조선 소녀에게 피부를 이식한 일은 서열과 반상의 차별이 당연했던 조선에선 일대 ‘사건’이었다. 가끔 자신의 살을 떼어 병든 부모를 봉양했다는 효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 어찌 자신의 피부를 떼어줄 수 있단 말인가.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곁에서 수술을 지켜본 ‘봉순 오마니’는 “나는 도저히 그런 일은 못하겠더라고요. 성경을 더 읽어야 할 것 같아요”라며 혀를 내둘렀다. 후에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될 소녀 김점동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는 제 친자매이거나 선생님이라면 피부를 떼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남이라면 도저히 못해요.”

사람들은 로제타가 믿는 종교에 대해 궁금해 했다. 피부를 이식받은 소녀는 누가복음을 읽기 시작했다. 로제타에겐 최고의 답례였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겐 말이 필요 없다. 상처를 싸매주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마음을 연다. 한국인들의 마음을 흔든 것은 바로 ‘정’을 넘어서는 기독교의 ‘이타심’이었다. 로제타는 교회와 학교에서 배운 기독교 정신을 단 한 번도 놓은 적이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평등하다.” 로제타를 영혼이 있는 의사로 만들어준 가장 고귀한 가르침이다. 연인에게 말하듯 그는 일기에 이렇게 고백하곤 했다. “나는 조선과 조선인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을 무척 사랑합니다.”

하희정 박사 <감신대 외래교수·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