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사상가이자 교육자. 1901년 함남 함흥의 유교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논어 등 한학을 공부했다. 열 살 때부터 매일 일기를 썼고, 평생 이 습관을 유지했다. 함흥공립농업학교 졸업 후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이듬해 일본 도쿄로 유학 가 기독교에 입문하고 야라이초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교회 내 분쟁을 목도한 뒤 이 교회를 떠났다.
김교신(사진)은 ‘무교회주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1861∼1930)가 지도하는 성서연구 모임에 나가 7년 동안 공부했다. 1927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서울 양정고보 등에서 지리학을 가르쳤고, 교편을 놓을 때까지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을 거부했다. 그는 양정고보 재직 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의 마라톤 코치였다. 손기정은 도쿄에서 열린 올림픽 예선전 통과 후 “오직 김교신 선생의 눈물만 보고 뛰어 우승할 수 있었다. 실로 큰 분”이라고 했다.
김교신은 우치무라의 사상을 계승,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친교를 갖는 이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이해했다. 이에 따라 매주 성서공부 모임을 갖고, 신앙잡지 ‘성서조선’ 발행을 통해 신앙공동체를 꾸렸다. 정기독자 중에는 이승훈 선생, 장기려 박사 등이 있었다.
김교신은 1942년 3월 성서조선 권두언에 쓴 ‘조와(吊蛙)’에서 동면한 개구리의 소생을 조선의 독립 가능성에 비유했다. 일제는 이 글을 빌미로 성서조선을 폐간했고, 김교신은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44년 함흥질소비료공장의 주택관리자로 입사했다. 조선인 노무자의 복지를 위해 일하던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1945년 4월 숨졌다. 정부는 2010년 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강주화 기자
기독교 사상가·교육자 김교신… ‘무교회주의’ 성서연구 모임서 공부하고 계승
입력 2016-01-08 2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