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 시절에는 언론통제가 심했다. 정권을 홍보하는 기사는 키우고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는 사전 검열을 통해 사정없이 삭제했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보도지침까지 만들었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언론통제는 설 땅을 잃었다. 그 자리를 언론플레이가 차지했다. 힘과 돈 있는 사람이나 기관, 정부 부처 등이 언론플레이를 적절히 활용했다. 1997년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을 출입할 때의 일이다. 재경원 간부들은 여론의 동향을 살필 필요가 있는 정책을 통신사에 흘렸다. 통신 기사를 보고 다른 언론의 반응이 좋으면 정책을 추진하고 그렇지 않으면 유예하거나 폐기했다. 검찰이나 정치권이 고급 정보를 특정 언론사에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언론플레이였다.
미국 국방부도 한·미 국방장관 회담을 앞두고 언론플레이를 구사한 적이 있다. 먼저 미 국방부 관계자가 미국 언론에 한국 정부가 이런저런 무기 구입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 특파원들은 미국 언론의 기사를 경쟁적으로 보도한다. 미 국방장관은 회담장에서 한국 언론의 기사를 거론하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잘 짜인 작전계획을 보는 것 같다.
최태원 SK 회장은 아내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이혼하겠다는 의사와 동거녀와의 사이에 혼외자(婚外子)가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최 회장은 한 언론에 보낸 편지에서 “결혼생활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점에 서로 공감하고 (중략) 우연히 마음의 위로가 되는 한 사람을 만났다”며 “수년 전 여름 그 사람과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두 가정을 동시에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옳지 않다”며 “제 잘못으로 만인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됐지만 적어도 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아이와 아이 엄마를 책임지려고 한다”고 말했다.
간통죄가 폐지되기 전에 불륜을 저지른 최 회장은 편지를 쓰면서 단어 선택에 무척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 공감하고’ ‘우연히’ ‘마음의 위로’ ‘제 잘못’ ‘저의 보살핌’ ‘책임’ 등의 표현을 보면 그렇다. 노 관장도 결혼생활의 파탄에 공감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가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버지로서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전형적인 언론플레이에 속하는 최 회장의 편지 공개는 거센 역풍을 맞았다. 이혼소송이 진행될 경우 SK의 지배구조에 변동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 탓에 SK 주가는 급락했다. 천문학적 규모의 시가총액이 증발했고 선의의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소중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아내들이 분개했고, 딸을 둔 아버지들이 분노했다. 특히 이들은 “두 가정을 동시에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옳지 않다”는 내용 중에서 ‘옳지 않다’는 표현에 격분했을 것이다.
한·일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해법 합의 이후 쏟아진 일본 언론의 보도 행태는 여론몰이나 다름없다. 아사히신문은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옮기는 것이 일본 정부가 위안부 지원 재단에 기금 10억엔을 내는 전제조건이라는 투로 보도했다. 일본 외무성이 이 보도를 부인했지만 치고 빠지는 인상을 줬다. 산케이신문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국 외교장관이 TV 카메라 앞에서 불가역적이라고 말했다”며 “이렇게까지 한 이상 약속을 어기면 한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끝난다”고 언급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일본 여론을 다독이기 위해 이런 언론플레이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론을 조작하기 위한 언론플레이는 역효과를 초래하고 동티를 내게 된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
[여의춘추-염성덕] 언론플레이의 폐해
입력 2016-01-07 1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