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재판정에 들어설 때면 늘 빌라도 법정에 서신 예수님을 어떻게 변호할 수 있을까 떠올리곤 한다.
“빌라도: 박변, 최후 변론 하시오.”
“박변: 재판장님! 유대 검찰총장 대제사장은 피고인 예수를 신성모독, 민족반역, 납세거부를 하였다는 이유로 기소했습니다. 그러나 공소 사실은 유대인의 종교와 관습에 관련된 것으로, 로마법이 적용되어야 할 본 법정에서는 재판권이 없는 바 공소기각 되어야 합니다. 모세의 법률을 적용하더라도 증인들의 진술이 엇갈릴 뿐만 아니라(막 14:56∼59) 허위일 가능성이 큰 점 등 명백한 증거가 없으므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무죄였다. 무죄한 피를 팔았다고 후회한 가룟유다(마 27:4), 옳은 자를 풀어주라는 빌라도의 아내(마 27:19), 세 차례 무죄를 선고하려던 빌라도(눅 23:22), 십자가의 주님을 의인이라 고백한 백부장(눅 23:47). 그들 모두 무죄의 증인이다.
판결을 포기한 빌라도. 그러나 주님은 침묵하셨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다. 무죄를 알고도 군중들의 폭동에 떨던 빌라도. 결국 그의 선택은 십자가형이었다. 무죄를 유죄로 선고한 자신의 죄는 자신의 손을 물로 씻으면서 무죄가 됐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과 대조된다.
침묵하시는 예수님. 대제사장의 추궁에도, 빌라도의 물음에도, 헤롯의 조롱에도 침묵하셨다. 주님은 자백과 부인 중 그 어느 것도 택하지 않고 침묵하셨다. 주님이 자백하더라도 증인들의 증언이 엇갈리므로 그는 무죄이다. 주님이 부인하면 더욱 더 명백한 무죄이다. 그러나 주님은 침묵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주님의 울부짖음을 들어보자.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 침묵의 목적을 알려준다. 주님은 인간의 법정에서 판결받기 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판단받기 원하셨다. 하나님은 십자가형에 처하신 주님을 재심을 통해 무죄로 선고하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신다.
반면 아담은 어떤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금단의 열매를 먹고 숨은 아담은 왜 먹었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이라고 대답한다(창 3:12).
현행 형사소송법은 피고인에게 진술거부권을 고지하여 침묵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자백을 강요당하지 않고 임의성 있는 진술을 통해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다. 진술거부권은 법률의 공격을 당하는 범죄자들의 방패다. 우리는 최근의 어떤 재판 과정에서 침묵으로 일관한 이들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만약 명백하게 무죄인 사람이 침묵한다면 어떤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을까.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변론권을 포기한 셈이다. 주님은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변론권을 포기하셨다. 반면 ‘판사’ 빌라도는 판결을 포기했다. 가바다(요 19:13) 재판석에서 그가 내린 판결문의 주문은 ‘예수는 무죄이나 유죄로 판결할 수밖에 없다’였다.
오늘 우리는 침묵의 재판에 등장하는 고소인 재판관 검사 변호인 중에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가. 비록 빌라도 법정에서 주님을 변호할 수 없지만 주님의 증인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박상흠 변호사 (대구노변제일교회 집사)
◇약력 :△경북대(법학)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현 동아대학교법무감사실 법무팀장.
[박상흠 변호사의 법률 속 성경 이야기] 침묵의 재판
입력 2016-01-08 1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