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심리학자 J 피아제는 어린이 심성의 특징으로 ‘자기중심성(egocentrism)’을 들었다. 이런 상태의 아동은 외계인지의 방법이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유치하다’라는 말도 자기 자신밖에 보지 못하는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을 때 사용한다. 어린아이는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보기에 이기적이지만, 성장하면서 이타적으로 상대방을 보기 시작하고 이때 자신의 삶에서 ‘교정’이 일어난다.
‘중심’이라는 측면에서 기독교는 세계의 다른 종교와 특별하게 다른 점이 있다. 세계의 종교들이 그 발생지를 중심으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이 있는 반면 기독교는 그 중심이 늘 변해 왔다. 기독교는 유대에서 출발했지만 그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제는 남미와 중국, 아프리카로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중심이동의 원인은 ‘권력’과 관계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교회가 세상 권력의 핵심에 서면 하나님께서 여지없이 그 축을 옮기셨다.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의 가장 큰 영향력은 교회가 가장 힘없고 고통당하는 자들 곁에 있을 때 강력하게 나타났다. 객관적인 중심이 아니라 십자가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기독교의 독특한 가치관이다. 기독교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지내시던 3년간 가까이서 주님을 따라다니던 제자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와 ‘권력’을 구한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명료하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막 10:43)
이런 의문이 든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정말 세상 권력을 탐하는 속물이었을까?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의 권력을 사용해 세상을 바꾸려는 꿈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이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권력을 가지려는 이유는 많은 사람을 섬기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섬기기 위해’라는 명분 아래 많은 크리스천이 권력에 대한 욕망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거철이 되면 많은 정치인이 교회를 찾는다. 문제는 섬기기 위해 가려는 그 자리가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라고 포장하지만 자신의 권력을 이루려는 속내가 드러나고 만다.
작금의 한국교회 역시 참 많은 소음을 내며 교단마다 ‘장’이 되려는 목회자들로 진흙탕싸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싸움판의 구호는 같다. ‘섬기기 위해’ 그 자리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목회자와 교회가 다다르려는 그 자리가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자신을 내어주고, 섬기고 희생하는 자리라도 그렇게 머리가 터지도록 싸움을 할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권력을 쓰지 않으셨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세상과 자리를 놓고 다툴 필요가 없었던 것은 예수님의 자리가 섬김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높은 자리에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셨다.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리라.”
이번 4월 총선에서 진정한 섬김으로 그 자리에 가려는 크리스천 정치인을 보고 싶다. 누군가를 밟고 그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그 자리에 오르려다 깨어지고 밟혀 십자가에 달리는 길이 진정한 승리임을 보여줄 누군가를 말이다. 정치인들에게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 너무 낭만적 바람일까.
김병삼 만나교회 담임목사
[바이블시론-김병삼] 객관적인 중심은 없다
입력 2016-01-07 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