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히스토리] 모던보이가 즐기던 ‘양탕국’, 이젠 밥보다 많이 찾는다… 대한민국 커피문화 변천사
입력 2016-01-08 04:05
“80년대에 비엔나커피가 있었다면 70년대에는 모닝커피가 있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케이블 TV 드라마에서 비엔나커피가 등장하자 포털 사이트에는 ‘어디 가면 비엔나커피를 마실 수 있느냐’는 질문들이 올라오고 있다. 80년대 청춘이었던 40대들이 비엔나커피의 추억을 되새긴다면 70년대 젊은 시절을 보낸 50∼60대들은 모닝커피를 떠올린다.
계란 노른자 동동 띄운 모닝커피는 국적불명의 커피지만 아메리카노 위에 하얀 휘핑크림을 얹은 비엔나커피는 족보(?) 있는 커피다. 1600년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유래된 비엔나커피는 마차에서 내리기 힘든 마부들이 생크림과 설탕을 얹어 마셨던 커피다. 그래서 원래 이름도 ‘서 있는 한 마리 마차’라는 뜻의 ‘아인슈벤나(Einspanner)’다.
빛깔과 맛이 탕약과 비슷한 데다 서양에서 들어왔다고 해서 ‘양탕국’으로 불렸던 커피의 인기가 요즘 대단하다. 주식인 밥보다 커피를 더 즐겨 먹을 정도. 농림축산부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음식 1위는 밥도 김치도 아닌 커피다.
이런 커피 사랑에 힘입어 장기적인 불황에도 커피의 생산과 매출은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커피 관련 업계에서는 커피 시장이 연평균 9%씩 증가한다고 보고 있다. 2013년 국내 커피 시장은 소비자가 기준 총 6조1650억원대로 추정된다. 관세청 집계에 따르면 2014년 커피 수입량은 13만9000t(5억9400만 달러)으로 2004년보다 3.6배 증가했다.
신(新)문물의 상징이었던 커피 한 잔
세계 60억 인구의 절반 이상이 즐겨 마시는 커피의 역사는 기원전 6세기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티오피아에서 염소를 기르던 목동 칼디가 우연히 커피 열매를 먹은 뒤 기분이 좋아져서 퍼뜨렸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0세기다. 페르시아의 내과의사 라제스의 의학 서적에 ‘커피’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이다.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95년. ‘서유견문록(西遊見聞錄)’에서 유길준이 1890년쯤 커피와 홍차가 중국을 통해 조선에 소개됐다고 적고 있다.
우리나라 커피마니아 1호는 고종황제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고종황제는 손탁 여사에게 커피를 대접받고 그 맛에 푹 빠졌다. 독일인 손탁은 러시아 초대 공사 웨베르의 처형이었다. 1897년 고종에게 하사받은 덕수궁 건너편 정동 2층 양옥집을 호텔로 운영하면서 1층에 한국 최초의 커피숍을 열기도 했다.
1910년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한 일본인들은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다방을 열었다. ‘신식 멋쟁이(모던보이)’ 부자들의 놀이터였다. 서민들은 엄두도 내기 어려울 만큼 커피 값이 비쌌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과 함께 확산된 커피문화
1950년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는 미국의 무상원조에 의존해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커피도 국내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서 값싼 인스턴트 커피가 흘러나오면서 대량 보급되었다. 1945년 서울에 60개 정도 있었던 다방이 50년대 말 1200개소로 늘어날 정도였다.
커피는 제한적이긴 했지만 1968년 정식 수입되었으나 관세 등으로 비싸서 여전히 ‘귀하신 몸’이었다. 70년대 경제가 연평균 9.6%의 고도성장을 이룰 때 생활이 넉넉해지면서 커피를 즐기는 이들도 늘었다. 동서식품은 1970년 국내 최초로 인스턴트커피를 생산했다. 동서식품 최경태 홍보팀장은 7일 “경제 수준을 봤을 때 커피 시장의 성장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해 국산 커피 개발에 나섰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고 말했다.
소득 늘면서 입맛도 고급화
88올림픽을 무사히 치러 국제적 위상을 높였던 그해 서울에 원두커피 전문점이 등장했다. 1988년 12월 압구정동에 문을 연 국내 최초 원두커피 전문점 ‘쟈뎅커피 타운1호점’에선 고품질의 원두를 그 자리에서 내린 에스프레소, 카페오레, 카푸치노 등을 팔았다. 소비자들이 직접 가져다 먹는 ‘테이크 아웃’ 방식을 도입했다.
1999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입구에 스타벅스 1호점이 오픈하면서 테이크 아웃 문화는 더욱 확산됐다. 카운터를 지키며 웃음으로 손님을 맞던 ‘마담’과 최신 유행 패션을 뽐내며 차를 날라주던 ‘레지’가 있는 다방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커피전문점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매개체였던 커피가 목적이 됐다. 커피의 맛을 즐기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인스턴트커피의 인기는 주춤한 반면, 원두커피 소비가 부쩍 늘었다. 입맛도 고급화 됐는데, 1인당 국민소득이 5000달러를 돌파하면서 생긴 생활의 여유가 한몫했다.
커피도 양극화 시대
사회 곳곳에서 올 한해의 과제로 경제 양극화 해소를 꼽을 만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극이 큰 요즘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커피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최근 국내 스페셜티 커피 시장은 급성장하고 있다. 스페셜티 커피란 미국 스페셜티 커피 협회에서 인증을 획득한 고급 커피로 전 세계 생산량의 상위 10% 이내에 해당한다. 스타벅스에서 파는 일반 아메리카노는 한 잔(톨 사이즈)에 4100원인 데 비해 같은 양의 스페셜티 커피인 ‘스타벅스 리저브’는 최고 1만2000원이나 한다.
커피 전문점들의 스페셜티 커피 코너보다 빠른 속도로 백다방, 고다방, 더착한커피 등 저가 커피 프렌차이즈와 편의점의 커피 코너가 생겨나고 있다. 여기서 파는 900∼20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즐기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어려운 경제, 커피 산업도 흐림
우리나라 커피 시장은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한국커피연합회 홍정기 부장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16년 경제성장률을 사실상 2%로 전망한 것을 보면 커피 시장도 예년의 성장세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이유로 홍 부장은 1인당 커피 소비량의 꾸준한 증가와 홈카페족의 등장 등 커피 문화 확산이 진행 중이라는 점을 들었다. 앞으로 3∼5년은 그 폭은 작지만 성장세는 이어갈 것이라는 게 커피 업계 관계자들의 예상이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