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회담 백서 번역 출간한 이동준 교수 “한·일회담 14년 동안 위안부 문제 언급된 적 없다”

입력 2016-01-07 04:10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한·일회담 백서가 번역 출간됐다. 1951년 예비회담으로 시작해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완료된 14년간의 한·일 교섭 과정을 일본 측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다. 외무성은 1968년 8월 ‘일·한 국교 정상화 교섭사 편찬위원회’를 구성, 2년6개월에 걸쳐 백서를 완성했다.

이 백서의 존재는 오랫동안 감춰져 있다가 일본 시민단체의 정보공개 요청에 따라 2006년부터 공개되기 시작했다. 외무성은 약 6만장에 이르는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하면서 4600장 분량의 백서를 곳곳에 흩어놓았다. 한국의 신문기자 출신으로 일본 기타큐슈대에서 국제관계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인 이동준(47·사진)씨는 2010년부터 공개된 외교문서를 뒤져 백서를 꿰맞췄고 번역 작업을 거쳐 ‘일한 국교정상화 교섭의 기록’(삼인)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일본에 있는 이 교수를 지난 5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책을 보면 한·일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혀 논의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 백서 어디를 봐도 위안부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도 위안부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일본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일본은 한·일회담으로 위안부 문제가 끝났다고 주장해온 것인가.

“일본은 협정서에 있는 ‘완전히’라는 문구에 위안부 등 모든 문제가 다 들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서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게 기본 입장이었다. 그래서 최근 위안부 합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정부가 합의하는 바람에 위안부의 개인청구권이 갑자기 없어져 버린 것이다. 더구나 ‘불가역적’이라고 해버리면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은 앞으로 한국 법원밖에 호소할 데가 없어진다. 일본 법원에 배상을 호소할 경우 ‘당신네 국가가 다 포기했는데 무슨 말이냐’ 이런 소리를 듣게 됐다.”

-우리 정부는 언제부터 위안부의 개인청구권을 인정해 왔나.

“노무현정부 시절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를 전면 공개하고 한일협정에 대한 재해석을 내렸다. 당시 결론이 청구권협정의 ‘완전히’라는 말 속에 최소한 세 가지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위안부 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 사할린 동포 귀환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건 다시 논의해야 한다는 게 정부 입장이었고, 이런 방침이 지금까지 유지돼 왔다.”

-한·일회담에서는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이 논의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한·일회담은 1937년 중일전쟁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까지 전쟁기간 한국인 피해 문제만 다룬 것이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전후 처리를 규정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하부 조약이었다. 식민지 시기 전체가 대상이 아니었다. 한·일회담에서 다룬 것은 징용자 미수금 문제가 사실상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독도 문제도 논의되는데.

“김종필(전 총리)은 최근까지도 한·일회담과 관련해 ‘독도 문제는 논의대상이 될 수 없다며 타협하지 않았다’고 얘기해 왔다. 그러나 일본 측 외교문서를 보면 일본이 독도 문제 해결 방법으로 ‘ICJ(국제사법재판소) 회부안’를 주장하자 김종필이 이를 거부하면서 ‘제3국 조정안’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제3국은 미국을 말하는 것으로, 미국에 독도가 누구 땅인지 물어보자고 한 것이다.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김종필이 한일협정을 타결하기 위해 독도를 가지고 거래를 시도한 것만은 사실이다.”

-한국이 만든 한·일회담 백서도 있다.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나.

“기본적으로 비교 대상이 안 된다. 우리 측 백서는 1965년 3월에 발간됐다. 1965년 6월에 한일협정이 조인되는데, 조인도 되기 전에 백서를 발간한 것이다. 분량도 200쪽에 불과하다. 당시 국내에서 반대 여론이 엄청나게 심했기 때문에 한·일회담을 정당화하기 위한 국내 선전용 찌라시로 만든 것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 측 백서는 분량도 많고 사실관계를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지금 50년 전의 한·일회담을 들여다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과 얘기를 하더라도 역사적인 사실관계부터 확인해야 한다. 식민지배 청산 문제가 왜, 어떻게 봉인됐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지금이라도 과거사를 청산할 수 있다. 이승만정부 초기부터 한국은 식민지배 문제를 청구권 문제로 해결하자는 입장이었다. 식민지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국내의 목소리가 많았지만 회담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구권 논의였다. 그것을 박정희정부는 식민지 피해 배상을 받은 것처럼 포장한 것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