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사과는 했다.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 ‘군의 관여 하에’라고 얼버무렸던 과거 고노 담화 등과 달리 정부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총리 ‘개인’이 아닌 ‘총리대신’의 자격으로 사과 표명을 한 것도 파격적이다. 외국 언론들은 ‘기념비적 합의’라며 호평을 쏟아냈다. 진보 성향의 미국 뉴욕타임스마저 ‘일본, 마침내 진짜 사과’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현재 국내에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모두 46명이다. 평균 연령은 89세다. 한 분의 할머니라도 더 살아계실 때 일본의 사과를 받아낸 것은 의미가 있다. 북핵을 이고 사는 우리 입장에선 언제까지 과거에 발목 잡혀 일본과 반목하며 지낼 수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과받은 당사자들은 더 화가 났다.
“어제로써 모두 끝이다. 더 사죄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한 이상 약속을 어기면 한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끝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협상이 타결된 뒤 측근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이전과 10억엔(약 99억원)의 군 위안부 지원 재단 출연금을 연계하는 것은 아베 총리의 의사다.” 이런 일본 언론 보도도 나왔다. “(소녀상은) 적절히 이전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법적 배상은 아니다.” 일본 관료들의 발언도 이어지고 있다. 위안부 협상이 타결된 이틀 뒤 아베 총리는 골프 라운딩에 나서 생애 최고의 스코어를 기록했다고 한다. 반세기 넘게 양국 사이에 걸려 있던 ‘목엣가시’를 해결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꽃다운 10, 20대에 일본군에 끌려가 성노예로 살았던 치욕스러운 세월을, 가족들마저 외면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타지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아야 했던 모진 세월을 돈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죽음을 목전에 둔 할머니들에게 수억원을 갖다 준들 무슨 소용이랴. 이러자고 무덤 속까지 꼭꼭 감춰두고 싶었던 치부를 용기 내어 노구를 이끌고 이역만리 외국 땅을 다니며 얘기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할머니들에겐 단지 진정한 사과가 필요할 뿐이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대방이 그 정도면 됐다고 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게 사과하는 사람의 최소한의 예의다. 일본이 진정성이 있다면 자신들의 치욕스러운 범죄를 잊지 않고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오히려 소녀상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둬야 옳다. 노아 펠드먼 하버드대 국제법 교수는 “범죄에 대한 기억은 보상과는 별개로 생생하게 유지돼야 한다. 한국정부가 침묵하면서 가해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을 중단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했다.
독일은 100세 가까운 나치 전범들까지 찾아내 끝까지 단죄하고 피해자들에게 배상했다.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를 찾아 나치에 의해 학살된 폴란드 유대인을 기리는 추모비 앞에 섰다. 갑자기 그는 비에 젖은 계단 위에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 이 한 장의 사진은 그때까지도 독일에 반감을 갖고 있던 유럽인들의 마음을 녹였다. 전 세계 언론은 “무릎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평가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침에 길을 나서면서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악행의 역사를 증언하는 장소에서 수많은 영령을 대하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사람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사과를 한다면 적어도 이 사람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
이명희 국제부장 mheel@kmib.co.kr
[데스크시각-이명희] 사과하는 법
입력 2016-01-06 1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