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사태 왜?] 사우디 대사관 방화는 이란 강경파의 개혁파 흔들기

입력 2016-01-05 21:13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외교 단절을 야기한 주이란 사우디대사관의 방화와 잇따른 과격 시위가 다음 달 총선(2월 26일)을 앞두고 하산 로하니(67·사진) 이란 대통령을 비롯한 현 집권세력인 온건개혁파를 흔들기 위한 이란 내 강경보수파의 ‘작품’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란은 ‘외국 대사관 방화’라는 자충수로 점점 더 고립 상황에 내몰리는 등 국내외 정국이 강경파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란 고위 인사들을 인용해 “대사관 방화는 로하니 대통령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강경보수파가 기획한 이벤트”라고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어 “강경파가 개혁파를 견제하려고 대중의 분노를 악용했으며 같은 목적의 더 과격한 사건이 계속 생겨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로하니 대통령은 2013년 6월 대선 때 강경파 후보들을 누르고 51%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서방의 경제제재로 10년 이상 고통받아온 이란 국민들은 핵 협상 수석대표 출신인 로하니를 새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당시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76)가 지지한 보수 진영 후보조차 12% 득표에 그치는 등 보수파는 큰 충격에 빠졌었다.

보수파는 지난해 7월 핵협상 타결 이후 개혁파의 인기가 더 올라가자 위기감을 강하게 느꼈던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다음 달 26일 총선에서 보수파가 장악한 의회 권력이 개혁파 중심으로 뒤집힐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총선 결과는 내년 로하니 대통령의 재선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다. 아울러 보수파는 ‘이란 혁명의 아버지’인 루홀라 호메이니(1900∼1989)의 손자인 하산 호메이니(43)가 최근 개혁파와 손잡고 총선 당일 함께 실시되는 국가지도자운영회의 의원 선거에 출마키로 선언한 데 대해서도 전전긍긍하던 상황이었다. 국가지도자운영회의는 차기 최고지도자를 뽑는 기관이다.

보수파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개혁파를 궁지에 몰아넣을 기회를 물색해 왔고, 마침 사우디의 시아파 지도자 처형이라는 호기가 찾아오자 과격 규탄 시위와 사우디대사관 방화를 통해 나라 전체 분위기가 다시 보수화로 치닫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한 개혁파 정치인은 FT와 인터뷰에서 “방화 현장에서 시위대가 셀카를 찍는 등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며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 2시간의 소요 사태는 요직을 꿰찬 보수파가 용인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강경보수파 핵심 인사들은 지금도 엘리트 군대인 혁명수비대, 사법부, 의회, 국영 방송, 공직후보 자격심사위원회 등에 포진돼 있으며 그 규모가 수천명에 이른다고 FT는 전했다.

이런 가운데 이란은 주변국과의 관계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사우디는 외교관계 단절에 이어 이란과의 교역, 항공편 운항, 여행도 중단시켰다. 사우디 우방인 쿠웨이트도 5일 이란 주재 자국 대사를 귀국시켰다. 또 사우디가 주축인 수니파 국가들의 모임인 아랍연맹(AL)은 오는 10일 이란을 압박하는 긴급회의를 개최키로 했다.

이란이 이번 사태로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인 중동 주변국들과 척을 지면서 이달 중 경제제재 해제의 훈풍이 불어도 ‘반쪽짜리’ 회복에 그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런 상황을 두고 미 뉴욕타임스는 “사우디의 집단 처형을 외교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이란이 오히려 시위대의 과격 행동으로 선동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화되며 위기에 몰렸다”면서 “이란이 사우디의 수에 놀아난 꼴이 됐다”고 꼬집었다.

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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