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하형록 <4> 한센인 마을 산다고 학교친구들에게 왕따 당해

입력 2016-01-06 17:53
어린 시절 이웃 동네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해도 그냥 웃어넘기던 아버지 하병국 목사, 필자와 형 영록, 여동생 은신(왼쪽부터). 여동생은 겁이 많아서 곧잘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했다.

어머니는 왜 그토록 싫어하시던 한센병 환자촌 7년 생활을 접고 떠날 절호의 기회를 포기한 것일까. 그것은 지난밤 꿈에서 본 찬란한 십자가 때문이라고 했다. “니 아버지 뜻에 따라 여기에 들어왔지만 내는 그들을 제대로 섬긴 적이 없었다 아이가. 그래서 내가 7년을 더 있기로 결정한 기다.”

어렸을 때는 그곳에서 사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그만 문제가 생겼다. 형과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다.

우리 형제가 한센병 환자촌에서 산다는 것을 알게 된 친구들이 그냥 놔두지 않았다. 어제까지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이 우리를 피하거나 ‘문둥이’라고 놀리고 왕따를 시켰다. 당시 나보다 한 살 많았던 영록이 형과 나는 학교를 같이 다녔다. 집에서부터 30분을 걷다가 버스를 탄 뒤 다시 20분을 더 가야 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버스정거장까지 가는 길에 조그마한 동네를 지나가야 했는데 그 동네 아이들이 우리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아이들은 그냥 말로만 놀리는 것이 아니었다. 돌을 던지거나 작대기로 때리면서 자기 동네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그 아이들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서 머리가 깨져 피가 난 적도 있었다. 우리 형제는 떼를 지어 쫓아다니는 아이들이 무서워서 다른 길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면 20분을 더 허비해야 했다. 형과 나는 죽을힘을 다해 달음박질해도 아이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쫓아오며 돌을 던졌다. 거의 매일이 전쟁 같았다.

한 번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탔는데 그때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내가 귀여워 보였는지 예쁜 차장 누나가 나한테 어느 동네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았다. “저 동네(한센병 환자촌)에 삽니더.” 그러자 그 누나의 표정이 갑자기 돌변했다. 형과 내가 낸 돈을 받지도 않고 그냥 내리라고 했다.

“형아, 와 내리는데….” 나는 버스에서 내리면서 착한 누나가 왜 내리라고 했는지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형은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께 그 얘기를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눈물을 지으면서 “우리 아이들이 세상의 멸시를 받으며 자라는구나”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때 너무 어려서 우리가 왜 그런 일을 당하며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당시 우리 집 형편은 정말 어려웠다. 나는 어려서 오히려 그런 것들을 힘들어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가슴 찡한 기억이 많다. 한센병 환자촌에서 13년을 살면서 우리 가족끼리 시내에 나가 외식을 한 적이 한두 번밖에 없었다.

한 번은 부모님이 아이스크림을 사주신 적이 있었다. 그런 걸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던 나는 아껴 먹는답시고 핥아먹다가 천천히 한 입 베어 물었는데 그만 녹아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우야노 아까버라.”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아이스크림은 땅바닥에 녹아버린 상태였다.

가게 주인은 야박하게도 내가 떨어뜨린 것이니 다시 줄 수 없다며 모른 척했다. 하는 수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것이 두고두고 아까워 그날 밤 잠을 잘 수 없었다. 눈앞에 아이스크림이 선해 잠이 오지 않았다.

외로운 한센병 환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게 아버지에게 그리고 어머니에게 부어져 우리는 그곳에서 6년을 더 살다가 그곳을 방문한 미국 선교사들의 권유와 배려로 미국 필라델피아로 건너가게 됐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