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의 이 명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거리는 매캐한 최루탄이 가득했고, 삶은 공권력에 짓밟히기 일쑤였으며, 가난한 이들이 넘쳐났던, 그 1980년대를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한다. ‘세월이 흘러 멀찍이서 바라보니 그렇다.’ 이 아이러니는 이렇게 밖에 설명이 안 된다. 이제 와 보니 그 시절은 따뜻했고, 희망찼고, 때때로 슬펐지만 기쁨과 즐거움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굳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리운 날들이 됐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응팔)이 그려내는 80년대는 유독 그러하다. 멀리서 봐도 충분히 보일만큼 반짝거렸던 것들을 가득 담아냈기 때문이다. 팍팍한 경쟁사회를 살아내느라 삶의 언저리로 밀려나버린 가치들이 보물처럼 드라마 곳곳에 박혀 있다.
끈끈한 가족애, 첫사랑의 풋풋함, 차별도 따돌림도 없던 교실 풍경, 학창시절을 채운 우정, 골목에서 매일 마주치는 이웃들과 나누는 정…. ‘응팔’은 88년의 정겨운 풍경 앞에서 따뜻하고 사려 깊은 인물들이 코믹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끌어 나가며 국민 드라마가 됐다. 종영 4회를 앞두고 많은 시청자들이 벌써부터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저 흘려보내기에는 소중한 ‘응팔이 밝혀낸 보물들’이 도대체 뭐 길래.
# 골목길에 흐르는 따뜻함
‘응팔’의 에피소드는 골목길에서 시작된다. 지금이라면 ‘저녁먹자’는 스마트폰 알림이 울렸을 텐데 ‘응팔’의 골목길에는 이름을 부르는 엄마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모여서 비디오를 보던 아이들은 엄마의 부름에 집으로 돌아간다.
이 단조로운 전개는 골목길에서 다시 경쾌해진다. 아이들은 엄마 심부름에 반찬 그릇 하나씩 손에 들고 다시 골목길에서 마주친다. 불고기에서 귤로, 카레에서 깍두기로, 상추에서 김으로…. 반찬들이 손에서 손으로 옮겨간다.
된장찌개 하나에 밥공기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최택(박보검) 부자(父子)의 식탁은 이웃집 반찬들로 하나씩 채워지며 풍성한 저녁상이 된다.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반찬 나르기에 동원된 김정환(류준열)이 “이럴 거면 다 같이 먹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기분 좋은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시멘트로 바른 벽, 깨진 병을 박아 넣은 담장, 울퉁불퉁하고 좁은 골목길은 사실 아름답지도 정겹지도 않다. 이런 골목길을 지금 마주한다면 착잡한 기분이 들 수 있다. 그 골목에 사는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불편, 불안,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는 탓이다.
하지만 ‘응팔’ 속 마을 공동체의 연대와 이웃에 대한 존중은 회색빛 풍경에 온기를 불어 넣었다. 콩 하나도 나눠 먹는 정, 불고기와 깍두기를 등가교환 하지만 부끄러워하지도 아까워하지도 않는 마음, 형편껏 돕고 그 마음에 고마워할 줄 아는 삶이 골목길에서 겹쳐진다.
모든 게 비용으로 계산되는 2016년 사회에서 ‘응팔’이 그려내는 공동체는 낯설다. 값을 지불한 만큼만 존중을 주고받고, 내어 준 게 있으면 부득부득 받아내야 하고, 싼 값에 산 물건을 쉽게 내다 버리듯 사람의 감정을 하찮게 여기는 풍조에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의 마음을 위로한다.
시청자들 사이에서 과연 그 시절 이웃들이 정말로 그랬느냐는 의문과 회의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하지만 실제 그런 관계가 있었든 없었든 ‘응팔’의 쌍문동 봉황당 골목길에서 주고받는 정(情)이 지금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가치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사람을 아끼는 사람들
제작진은 ‘응팔’의 주인공을 묻는 질문에 “가족”이라고 답했다. 가족으로 묶여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성덕선(혜리)과 정환, 택의 삼각 러브라인도 중요한 이야기지만 등장인물들이 관계 속에서 겪는 일들이 매회 주요 에피소드로 다뤄진다.
늘 당당하고 강해서 모든 걸 다 척척 해낼 것 같았지만 “엄마가 영어를 몰라”라고 말하는 엄마, 알고 보면 슈퍼맨이 아닌 아버지들, 아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서도 홀로 우는 엄마의 외로운 뒷모습, 아들이 사고가 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맨주먹으로 자물쇠를 뜯어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뭉클함을 자아냈다.
사실 가족이 그려내는 따뜻함은 그 시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이웃집으로, 학교로 뻗어 가면 지금 사회 모습과는 사뭇 다른 그림이 나온다.
고3이 된 덕선이네 반의 반장 이야기는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간질을 앓고 있는 반장이 교실에서 발작을 일으켰다. 이 때 아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교실 문을 닫고 온 몸으로 창문을 가린 거였다.
반 친구들이 쓸데없는 소문을 차단하고 있을 때 덕선이는 반장 엄마의 부탁대로 응급조치를 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끝내 이 사건을 모르는 척 해 줬다. 학교폭력과 지독한 경쟁이 일상화된 교실, 누군가 어려움을 겪을 때 손을 내밀기보다 스마트폰을 먼저 들이대는 살풍경에 익숙한 시청자들을 뜨끔하게 한 장면이었다.
#느리고 불편했지만 체온이 느껴지는 것들
휴대전화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은 1인1폰 시대의 시청자들에게 집 전화로 성보라(류혜영)와 만날 약속을 한 김선우(고경표)는 이렇게 말한다. “전화기 없었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기다림이 손해나 민폐가 아니라 설렘이 되는 게 ‘응팔’이 그리는 80년대 모습이다. 드라마 속 김정봉(안재홍)과 장미옥(이민지)은 같은 건물 1층과 2층에 각각 있으면서 “지금 어디냐”고 당장 확인할 수 없었기에 마냥 기다려야 했다. 미옥과 정봉의 설렘은 오랜 기다림으로 극대화됐다.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되던 시절은 지금보다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대로 살만 했음을 보여준다. 아이에게 해야 할 급한 연락은 학교에 전화를 걸어 선생님을 통하면 됐다. 학교 전화번호는 두꺼운 전화번호부책을 뒤지면 나왔다.
드라마는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많아 불편했고, 불편했기 때문에 느렸고, 느렸기 때문에 더 많은 것들을 느끼며 살 수 있었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등장인물들은 라디오에 직접 꾸민 엽서를 보내고, 비디오테이프에 TV 방송을 녹화하고, 우편함 앞에서 편지를 기다린다.
‘응팔’은 이처럼 디지털 시대에는 좀처럼 느끼기 힘든 작은 설렘, 사소한 즐거움이 가능했던 아날로그 삶을 보여주고 있다. 시청자들은 드라마가 그려내는 따뜻함에 열광적인 반응으로 응답하고 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끈끈한 가족애… 따돌림 없는 학교… 콩닥콩닥 첫사랑… 참 그립고 정겹네… 응답했다, 1988!
입력 2016-01-06 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