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패권·왕권 흔들린 사우디, 이란과 ‘종파전쟁’ 승부수

입력 2016-01-04 21:04
한 무슬림 여성이 3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주재 사우디아라비아대사관 앞에서 전날 사우디가 사형을 집행한 이슬람 시아파 지도자 ‘셰이크 님르 알님르를 위한 정의’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수니파 정부인 사우디의 사형 집행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중동 및 서방의 시아파 무슬림 전체로 확산되는 등 이슬람 양대 종파 갈등이 점점 첨예해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가 3일(현지시간) 이란에 국교 단절이라는 ‘초강수’를 꺼내 든 것은 전날 시아파 지도자 등 47명에 대한 집단 사형집행을 강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최근 사우디는 유가 급락으로 인해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동안 국민에게 지급하던 보조금을 축소할 지경에 이르렀다. 또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 개입에 나선 예멘 내전도 10개월째 별 성과 없이 장기화되고, 시리아 내전과 이슬람국가(IS) 퇴치 역시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수니파 종주국’으로서의 역내 정치적 리더십은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시아파 종주국’ 이란은 지난 7월 사우디의 전통적 우방인 미국 등 서방국가들과 13년 만에 핵협상을 성사시켰다. 이로써 그동안 사우디가 이란 핵 위협 등을 지렛대로 서방으로부터 보장받아왔던 중동 정치의 헤게모니가 이란 쪽으로 급속히 이동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외부상황과 맞물려 지난해 1월 즉위한 살만 빈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의 건강이상설에 이어 쿠데타설까지 나도는 등 왕가 내부의 불안정도 사우디로서는 시급히 타개해야 할 체제 위협적인 요소였다.

사우디 정부는 이런 위기들을 돌파하기 위해 군사적 방법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 있는 시아파 처형과 이란과 외교관계 단절이라는 카드를 꺼냈을 가능성이 높다.

반정부 시아파를 처형함으로써 왕권 도전세력에 본보기를 보이는 동시에, 이란에 단호한 대응을 통해 중동의 수니파 진영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서방의 이란 친화적 변화에도 경고 신호를 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그동안 공격적인 성향을 보여온 살만 국왕의 통치방식에도 부합한다고 AP통신은 분석했다. 지난해 살만 국왕 취임 이후 사우디의 사형 집행 건수는 전년도의 두 배 수준인 150명을 넘어섰다.

이번에 외교관계가 단절된 사우디와 이란은 오랫동안 반목해온 이슬람교 두 종파의 본산이며 역사적으로 굵직한 외교사건 때마다 대립해온 대표적인 앙숙 관계다. 1987년 7월 사우디 메카 성지순례에서 순례객과 경찰이 충돌해 이란인 275명 등 400여명이 숨지자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대가 사우디대사관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사우디 외교관 한 명이 대사관 건물에서 추락해 숨지는 문제로 양국은 국교를 단절했었다.

1991년 국교 회복 이후에도 양국은 줄곧 힘겨루기를 해왔다. 특히 나라 밖 예멘과 시리아에서도 대치해 왔다. 예멘에서 이란의 후원을 받는 시아파 후티 반군이 수니파 정부를 공격하자 사우디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내전을 키웠다. 시리아에서는 이란이 시아파인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는 반면 사우디는 수니파 반군들의 편에 서 있다. 또 이란 핵협상에서도 사우디는 우방인 미국 앞에서 공공연히 협상 내용에 불쾌감을 표시하며 반대해 왔다.

수니파·시아파 맹주국인 사우디와 이란의 정면충돌로 한동안 중동 정세는 다시 먹구름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서방의 한 고위 외교관도 “이번 사태가 예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지역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말했다.

중동 각국이 종파에 따라 사우디와 이란을 각각 옹호하며 분열 양상을 보이면서 아랍국가들과 서방의 IS 격퇴전 역시 주춤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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