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하형록 <3> 한센병 환자촌서 태어나고 자라는 ‘특별한 축복’

입력 2016-01-05 17:29 수정 2016-01-05 21:19
부산 한센병 환자촌 시절 사택 마당에서 찍은 가족사진. 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필자, 친척, 아버지 하병국 목사, 어머니 전근녀 사모, 형 영록, 남동생 명록, 여동생 은신.

돌아보면 내 삶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특별한 축복 안에 있었다. 단지 심장 이상으로 죽음과 마주서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내가 미국에 온 것은 1969년, 열두 살 때였다. 그 전까지는 나의 가족은 부산에 살았다. 어린 시절, 나의 인생을 결정지은 가장 큰 요인은 아버지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의 담대함이다. 바울이 담대하게 자기가 체포될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듯이 아버지는 한센병 환자촌을 자신의 사역지로 택했다.

당시 한센병 환자는 위험한 전염병을 가졌다고 생각해서 접근 기피 대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나 마을과는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이나 섬에 격리되어 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목회자도 흔치 않았다.

부산 고려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아버지는 “육신의 더러움은 영의 더러움보다 가볍다”면서 한센병 환자촌 목회를 결심했고, 결혼 후 어머니를 데리고 한센병 환자촌으로 들어가 목회를 시작했다.

원래 아버지의 고향은 경남 거창이다. 아버지는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민족과 나라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죽을 고비를 맞았다. 죽음과 직면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부르며 이렇게 외치셨다고 했다.

“하나님, 저를 살려 주시면 평생 당신을 주로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한 후 아버지는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을 향해 뛰었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함께 포탄을 뚫고 뛰던 학도병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아버지는 그때부터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망설임 없이 첫 목회지를 한센병 환자들을 섬기는 곳으로 결정한 것 같다. 덕분에 나는 한센병 환자촌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곳은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매캐한 약 냄새가 아직도 선하다.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대개 한센병 환자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긴 해도 사람이 그렇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 자신도 어떻게 생겼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냥 같이 손을 잡고 놀 수 없으니까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거나 장난을 치는 것이 전부였지만 보통 아이들 대하듯 거리낌 없이 어울려 놀았다.

나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당시 한센병 환자촌에 들어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죽으러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보란 듯이 그곳에서 7년간 건강하게 살았고, 아버지는 작정한 기간이 끝나자 부산의 한 교회의 청빙을 받아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30대 초반이었으니 얼마나 가고 싶었을까.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첫 7년이 끝날 무렵 나는 코흘리개 여섯 살 꼬마였다. 이삿짐까지 다 싼 것 같은데 며칠이 지나도 우리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나중에 커서야 어머니에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7년을 더 있자고 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목회자인 남편의 뜻에 따라’ 할 수 없이 한센병 환자촌에 들어왔으나 거기서 사는 것이 죽고 싶을 만큼 싫어서 작정한 7년이 지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이삿짐까지 꾸리고 나가려는데 꿈에서 찬란한 십자가를 보셨단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