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새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입력 2016-01-03 18:03

해가 바뀌고 나흘째 아침, 아직 새해 인사가 넘친다. 특히 오늘은 2016년 첫 월요일. 관공서를 비롯해 대부분 기업들도 신정 연휴 후 첫날을 맞아 신년하례를 준비했을 터다. 전망은 우울해도 신세덕담(新歲德談)에는 축복이 가득하다.

이웃을 향한 신세덕담과 함께 이즈음 스스로 다짐하는 결심·결단도 빼놓을 수 없는 행사다. 다양한 목표를 정하고 방법을 다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모든 바람은 ‘새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로 모아지지 싶다.

고대 이스라엘왕국이 남북으로 갈려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고 남유다왕국마저 휘청거릴 때 이야기다. 왕국의 존망과 관련해 예언(預言)이 선포된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아,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둘러보고 찾아보아라.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샅샅이 뒤져보아라. 너희가 그 곳에서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내가 이 도성을 용서하겠다.”(예레미야서 5장 1절)

‘한 사람’을 못 찾아서, 바르게 살려는 바로 그 한 사람이 없어서 나라가 백척간두에 섰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위대함을 말하자면 성탄절 스토리를 빼놓을 수 없다. 한 아기가 와서 온 세상을 구했다고 고백한 게 불과 열흘 전이 아닌가. 한 사람은 그렇게 중요하다.

세계를 구하고 왕국을 살리는 한 사람도 있지만 구체적인 ‘한 사람들’도 숱하다. 식구들 가운데 한 사람, 벗들 중 한 사람, 작은 공동체의 한 사람, 크고 작은 기업·조직에 속한 바로 그 한 사람의 존재가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 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우리는 상대를 한 사람으로서 평가하기보다 집단의 틀에 묶어 재단하는 데 익숙하다. 꼴통우파 종북좌파 등으로 보수와 진보를 난도질하고 출신 지역별로 각각의 한 사람을 쉽게 규정한다. 친박 비박 반박 친노 비노 등의 구분은 한국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천박한 모습이다.

우리의 교육은 스스로 한 사람이 되기를 가르치기보다 다수에 진입하기 위한 기능과 대중을 지배하는 한 사람이 되는 지식에만 집중하고 있다. 리더십을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팔로어십(followership)의 섬김에 대해서는 인색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한 사람이 되기보다 익명을 앞세워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를 질타하기 바빴다.

문제는 늘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나의 미숙함보다 조직의 무능에 있다고 믿었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생각보다 정치를 비난하고 폄하하기만 했다. 하다못해 주민자치회에도 직접 참여해 그 한 사람이 되기보다 돌아서서 조직 운영의 불합리와 패거리주의를 질타했다. 그 결과 어렵게 쟁취한 민주화는 비틀거리고 생활민주주의는 아예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새해엔 나를, 우리를 돌아보려는 다짐이 절실하다. 비판과 저항을 포함한 개개인의 성찰이 쌓일 때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은 비로소 작동한다. 오늘날 국가경쟁력은 집단지성의 다툼으로 결정된다. 나 자신을 우선 필요한 한 사람으로 연마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 사회에도 무수한 ‘그 한 사람’이 등장했으면 한다. 나를 바라보는 동료에게도 그를 보는 나의 마음에도 서로를 한 사람으로 존중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함석헌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마지막 연)

세상을 아파하고 공의를 좇으며 진리를 구하는 그 한 사람을 보고 싶다. 너도 나도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조직이 바뀌고 나라가 거듭나는 역사를 보고 싶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