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광장시장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이상붕(61)씨는 25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커피를 팔고 있다. 보리차를 끓여 먹던 커다란 주전자가 가스 불 위에 놓여 있다. 매점을 열어두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전자는 계속 데워진다.
주전자 옆에는 커피·프림·설탕이 든 유리병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다. ‘매점 커피’ 제조법은 간단하다. ‘2·2·2’. 종이컵에 커피·프림·설탕을 두 스푼씩 넣는다. 물은 종이컵의 절반이 조금 넘게 따른다. 티스푼으로 휘휘 저으면 600원짜리 ‘추억의 다방커피’가 완성된다.
한국인에게 커피는 밥보다 자주 찾는 기호식품이 됐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1주일에 쌀밥을 7번 먹는 동안 커피는 12.3번 마신다고 집계했다. 연간 커피 소비량은 1인당 338잔(3.38㎏)이나 된다.
요즘 “커피 마시자”는 말은 “커피전문점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마시자”는 뜻으로 통한다. 설탕과 프림이 잔뜩 들어간 다방커피는 아메리카노에 자리를 빼앗긴 지 오래다. 최근엔 아메리카노 ‘가격 파괴’가 한창이어서 1000원대도 등장했다.
어느 골목에나 한두 개씩 커피전문점이 있는 시대에 기어코 다방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도심 가판대나 전통시장 주변에선 여전히 종이컵에 담긴 다방커피가 인기다. 왜 이들은 다방커피를 찾는 걸까.
커피 주문은 전화 한 통이면 된다. 이씨는 목소리로만 듣고도 누가 주문하는지 알아챈다. 입맛에 맞춰 커피와 프림, 설탕 비율을 맞춘다. 지난 28일 아침, 수화기 너머로 “커피 두 잔”이라는 주문이 새어나왔다. 순식간에 블랙커피와 설탕커피가 만들어졌다. 커피 두 잔은 은색 쟁반에 놓여 배달됐다. 이씨는 “20년 넘게 여기서 장사하다 보니 누가 어떤 커피를 마시는지 다 안다”며 “시장 상인들은 잠도 못 자고 일찍 나오니까 대부분 진한 커피를 좋아한다”고 했다.
매점에 직접 찾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많다. 10년 넘게 광장시장에서 옷을 팔다 지금은 그만뒀다는 한모(71·여)씨는 집이 의정부인데도 굳이 이 매점을 찾아왔다. 한씨는 “여기까지 놀러 오는 건 커피 탓도 있다. 내 입맛대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니까. 몸에 좋든 나쁘든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게 좋다”며 수줍게 웃었다.
광장시장 안쪽의 또 다른 간이매점에서도 상인 이모(62·여)씨가 커피와 토스트를 판다. 한 잔에 700원 하는 커피를 공짜로 줄 때도 많다. 몸이 안 좋아 늦게 장사 나온 상인에게는 “추운 날 나오셨네, 몸은 좀 어때요”라고 안부를 물으며 자연스럽게 커피 한 잔을 타 준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 몸이 풀린다며 두 사람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서울 종묘 근처에는 중국동포 김모(58·여)씨가 운영하는 ‘이동식 카페’가 서 있다. 보온병과 커피믹스, 녹차 티백을 갖춘 카트로 여기저기를 옮겨 다닌다. 종류에 상관없이 한 잔에 500원. 쌍화차를 주문한 김학영(70)씨는 “날씨가 추워 쌍화차 한 잔이 생각나서 들렀다”며 “항상 이 자리에 있진 않지만 눈에 띌 때마다 한 잔씩 마신다”고 했다.
다방커피를 찾는 이들은 커피보다 정(情)을 마신다고 했다. 사람이 그립고, 정이 고파서 일부러 들른다. 3년 전 남편을 떠나보낸 ‘이동식 카페’ 주인 김씨는 손님이 올 때마다 밝게 웃으며 눈을 맞췄다. 날씨며 안부 등을 묻는다. 그래서 그냥 커피 한 잔이 아니라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
[기획] 그 시절, 추억에 젖다… 커피전문점 시대, 기어코 ‘다방커피’ 찾는 사람들
입력 2016-01-01 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