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4·13 총선에 적용될 선거구를 획정하지 못해 기존 246개 선거구가 사라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선거를 앞두고 기득권 지키기에 연연한 국회의원들이 고유 업무인 입법 활동을 내팽개친 결과다. 이에 따라 이번 총선에서 현역 의원을 대거 물갈이해야 한다고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31일 본회의를 주재하며 “대의민주주의를 스스로 훼손한 국회에 대해 국회의장으로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며 여야에 이날 자정까지 선거구 획정 타협을 촉구했다. 정 의장은 막판까지 여야 대표를 불러 협상을 주선했지만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비례대표 선출 방식 등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결국 정 의장은 ‘입법 비상사태’의 개시 시점이라고 언급했던 1일 0시를 기해 선거구 획정 기준을 선관위 산하 선거구획정위원회에 전달했다. 이 획정 기준은 지역구를 기존대로 246개로 하고 비례대표를 54석으로 하는 안이다. 19대 총선 선거구 획정 당시 인천 서·강화 등 4개 선거구를 시·군·구 분할 허용 대상으로 지정했던 것처럼 일부 특정 선거구에만 현행 시·군·구 분할 금지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 방안도 포함됐다. 정 의장은 또 획정위에 지난 8월 31일로 돼 있는 선거구 획정 인구 기준 시점을 10월 말로 늦추는 방안도 함께 건의했다.
정 의장은 이 기준을 바탕으로 한 획정위의 안을 받아 소관 상임위원회인 안전행정위 심의를 거쳐 8일 본회의에서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정 의장이 획정안을 직권상정하더라도 본회의에서 부결될 가능성이 있어 자칫 선거구 부재 상태가 장기화할 가능성도 있다. 지역구가 크게 주는 농어촌 의원들이 반발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여야 지도부는 지난 주말까지 ‘선거구 획정 협상→결렬→네탓 공방’을 반복해 왔다. 그나마 선거구 획정 시한을 며칠 앞두고는 여야 모두 공천 경쟁과 권력 다툼에 매몰돼 자발적으로 협상 테이블도 마련하지 않아 ‘무책임의 극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정치권 안팎에선 고의성 짙은 선거구 획정 지연 사태에는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 지키기 꼼수가 깔려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권 관계자는 “역대 총선 때마다 현역들은 선거구 획정을 질질 끌면서 자기들만 유리한 방향으로 선거운동을 하려고 욕심을 부렸다”고 지적했다. 현역 의원들은 의정보고회 등 사실상 선거운동을 하는 데 지장이 없어 굳이 선거구 획정을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관위가 예비후보의 혼란을 고려해 선거구가 무효화됐지만 선거운동을 오는 8일까지 잠정 허용하겠다는 ‘편법성’ 방침까지 밝혔지만 예비후보들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한 예비후보는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법을 어긴 날로 사실상 19대 국회는 사망선고를 받았다”며 “공천 경선이나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기존 정치권을 꼭 심판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히려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 지키기가 국민들의 기성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켜 유권자에 의한 대대적인 물갈이 움직임이 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선거구 무효 사태는 만연해 있는 정치 무관심과 냉소주의를 깨우는 계기될 것”이라며 “투표 참여가 낮은 젊은층과 무당층이 신당 바람과 맞물리면서 기존 정치인 심판 대열에 나설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
현역의원 ‘기득권 태업’에… 선거구가 사라졌다
입력 2016-01-01 0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