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한때 어두운 세계에 몸담았던 이상근(52)씨. 나이 들어 교회에 출석하며 봉사활동을 통해 속죄의 삶을 살아 왔다. 그러던 지난 5일 교회에서 식사 도중 갑자기 호흡곤란으로 쓰러졌다. 서울대병원에 실려갔지만 뇌사에 빠졌다.
평소 ‘과거’를 뉘우치며 “죽을 때만큼은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터였다. 오래 연락을 끊고 살았던 가족은 그의 뜻을 존중해 장기기증을 결정했다. 이씨는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 3명에게 간과 좌우 신장(콩팥)을 나눠주고 세상을 떠났다.
지난 19일 전주예수병원에서 뇌사 판정을 받은 김성자(63·여)씨도 간과 좌우 신장, 안구 등 5개 장기를 생면부지의 환자들에게 나눠주고 눈을 감았다. 가족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했으니 편히 가실 것이라 믿는다”며 슬픔을 삼켰다.
그리고 31일 새벽, 강릉아산병원에서 뇌출혈로 뇌사 판정이 내려진 이모(50)씨의 장기기증과 이식 수술이 이뤄졌다. 그의 간과 좌우 신장, 오른쪽 각막을 이식받은 환자 4명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이씨는 올해 장기를 기증한 500번째 뇌사자였다.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장기기증원(KODA)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숭고한 생명 나눔을 실천하는 뇌사자 장기기증이 사상 처음 연간 500명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질병관리본부 장기이식관리센터에 따르면 뇌사자 장기기증은 2000년 52명, 2003년 68명, 2006년 141명 등 조금씩 늘다가 2008년 256명, 2011년 368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2008년 권투 경기 도중 뇌사에 빠진 최요삼 선수와 2009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 생명 나눔을 확산시킨 결과였다.
최 선수는 간·신장·심장을, 김 추기경은 각막을 기증했다. 하지만 2012년 409명을 기록한 뒤 지난해 446명까지 3년째 400명대에 머물렀다. 2015년의 마지막 날 500번째 뇌사 장기기증이 이뤄져 집계가 시작된 2000년 이후 15년 만에 10배로 증가했다.
하종원(서울대병원 외과 교수) 장기기증원 이사장은 “2012년 도입된 뇌사 추정자 신고 제도가 정착되고 지난 10월 개최된 세계장기이식 및 기증의 날 행사, 생명의소리합창단 창단 등이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 개선에 기여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인구 100만명당 뇌사 장기기증자 수는 올해 9.7명으로 장기기증 선진국인 스페인(35.1명·이하 2013년 기준) 미국(25.9명) 프랑스(25.5명) 영국(20.8) 등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다. 지난해 뇌사추정 신고 1615건 가운데 36%만 최종적으로 장기기증을 결정했다. 31일 현재 장기이식 대기자는 2만6735명. 해마다 1100명 이상이 장기이식을 기다리다 끝내 생을 마감한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단독] 생명의 ‘배려’ 뇌사 장기기증 연간 첫 500명 돌파
입력 2015-12-31 17:50 수정 2015-12-31 1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