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이뤄진 조선인 모집 노무동원이 강제적이지 않았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이 발표됐다. 일본의 탄광 등 노동현장에서 민족차별이 없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강제성’과 ‘민족차별성’은 일본의 식민지배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 요소로 꼽힌다.
‘위안부 협상’ 결과에 여론이 들끓고,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강제동원위)가 올해를 끝으로 해산되는 와중에 나온 논문이어서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우연 연구원은 위안부 협상이 타결되기 하루 전인 지난 27일 ‘전시기 일본의 조선인 노무동원과 탄광의 노동환경’이라는 논문을 연구소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했다. 1987년 설립된 낙성대연구소는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연구로 뉴라이트 사관(史觀)에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연구원은 논문에서 조선인 탄광노동자들이 강제로 연행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전시 이전 다수의 조선인 청장년층이 모집 방식을 거쳐 ‘돈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전시에도 일본행을 택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 연구원은 “일부 선행연구는 ‘논밭에 트럭을 대고 일을 하는 농부나 행인을 무차별 연행하고 깊은 밤에 침실로 들이닥쳐 무력으로 연행했다’고 주장하지만…(중략)…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동원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고 논문에 썼다.
탄광 현장에서 민족차별도 없었다고 봤다. 위험하고 열악했던 갱도 내부에 근무한 조선인 비중은 92.3%로 일본인(59.8%)보다 훨씬 높았다. 이 연구원은 “선행연구들은 갱내부가 압도적으로 많은 현상을 ‘의도적 민족차별’의 결과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는 청년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인의 노동공급이 일본 청년들이 빠져나간 탄광의 노동수요를 충족시킨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분석했다.
강제동원위와 학계는 일본 정부조차 인정하는 ‘강제성’을 부정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장은 “군 입대와 노무동원 중 고르게 하거나 경제적인 보수를 속여서 데려가는 경우가 많았고 전시로 넘어가면서 의지대로 돌아올 수 없었으므로 강제성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혜경 강제동원위 조사1과장은 “일본 자료에 기초해 오류가 많고, 기존 연구의 일부만 발췌해 맥락과 다른 부분이 많다”며 “일본 정부조차 ‘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서 데려간 것’ ‘교육시켜서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착각하게 하기 위해 데려간 것’이라며 강제동원으로 규정하고 공식 인정했다”고 반박했다. 이어 “갱내부에서도 일본인은 주로 광맥만 찾고 철수하는 선탄부나 기계 조작을 맡았지만 조선인은 굴진부에서 직접 채탄하며 고강도 노동에 시달렸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 연구원은 “모집이나 관청 알선 동원기에는 자발적으로 간 사람도 많았다는 점을 설명하는 취지”라며 “갱내부 근무 역시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기술이 없는 조선인 인력을 활용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 연구원은 노무자로 동원된 조선인이 약 72만명이라고 밝혔다. 우리 정부는 국외 노무에 동원된 인원을 104만5962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 가운데 102만125명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35만6995명이 탄광에서 일했다.
안중근평화연구원 신운용 박사는 “나치 지배가 독일 경제의 기초를 닦았다고 주장하면 독일에선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식민지배로 파생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식민사관 연구가 이어지는 지금의 추세는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이면”이라고 했다.
전수민 이경원 기자 suminism@kmib.co.kr
[단독] 이 판국에… “일제 노무동원 강제 아니었다” 논문 논란
입력 2015-12-30 17:39 수정 2015-12-30 2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