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딸로 곱게 곱게 자란 죄밖에 없는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88) 할머니가 그간의 마음고생이 떠올랐는지 울먹였다. 이내 할머니의 목소리는 단단해졌다. “저는 나이가 아직 젊습니다. 팔십팔 세. 활동하기 딱 좋은 나이입니다.” 이 할머니는 끝까지 싸워 먼저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한을 풀겠다고 했다.
30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맞은편에서 올해의 마지막 수요집회가 열렸다. 매년 마지막 수요집회는 사망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추모제로 열린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올해 세상을 떠난 아홉 할머니의 사진과 이름을 붙여놓고 추모제 형식으로 1211번째 수요집회를 했다. 신상이 공개되지 않길 바랐던 두 할머니의 사진은 없었다.
이용수(88) 길원옥(87) 할머니는 일본대사관을 바라보고 앉았다. 고(故) 이효순 할머니의 아들 이동주(64)씨가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지난 5월이 그냥 가지 않고 이효순 여사를 하늘로 모셔갔습니다”로 시작한 편지는 “엄니! 예! 약속할게요. 싸워서 이길게요.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라는 말로 끝났다. 그는 어머니가 위안부 피해자임을 평생 숨기다 4년 전에야 자식들에게 털어놨다고 했다. 이씨는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참고 사셨을까”라며 “지금은 손주들까지 할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는 분노보다 차분하고 당당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윤 대표는 이번 한·일 외교장관 회담 결과에 대해 “말장난으로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 해도 우리가 여기에 있다”며 새로운 활동 계획을 밝혔다. 그는 국제시민사회와 연대해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국내에서도 전문가와 시민이 함께할 조직을 만들어 전국 각지에 평화비를 세우겠다고 덧붙였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대학생 모임 ‘평화나비 네트워크’ 김샘 대표는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 정부에도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한국 정부에도 화가 났다”며 “소녀상이 혼자 있지 않도록 함께하겠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고 했다.
참가자 700여명(주최 측 추산 1500명)이 돌아가신 할머니들 사진 앞에 차례로 헌화한 뒤 수요집회는 오후 2시쯤 끝났다. 시민들은 자리를 뜨기 전에 이용수 길원옥 할머니에게 다가가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어머니와 함께 집회에 참석한 김한서(11)군은 “할머니들이 얼마나 외롭고 집에 가고 싶으셨을까 생각이 들었다”며 “제가 먼저 어머니께 (수요집회에) 가보자고 했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윤희(23·여)씨도 “피해자 할머니들의 마음에 상처가 남지 않게 일이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수요집회에 앞서 회담 결과에 대한 규탄시위가 소녀상 앞에서 이어졌다. 위안부 문제 한·일 협상안 폐기를 위한 대학생대책위원회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이 회복될 때까지 싸우겠다”며 합의안을 찢는 퍼포먼스를 가졌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 9개 단체도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회담을 ‘굴욕 야합’이라고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소녀상을 만든 작가 김운성 김서영씨 부부는 이 자리에서 “해결되지 않은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소녀상의 발뒤꿈치가 들려 있다”며 “회담 결과를 보니 아직도 땅에 편안하게 발을 딛지 못한 상황인 듯하다”고 말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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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2-30 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