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臨政 청사 지나치게 깔끔하게 단장… 抗日 혼 사라져”

입력 2015-12-30 04:07
중국 상하이 신톈디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내부(왼쪽 사진). 임시정부 청사 안으로 들어서면 김구 주석 흉상을 볼 수 있다. 오른쪽 사진은 청사를 찾은 관람객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에서 한·일 위안부 협상까지…. 올해는 역사 논쟁의 해로 기억될 만하다. 국정 교과서가 나오는 내년에는 더 격화될 전망이다. 특히 임시정부 정통성 논란은 국정화 논쟁을 관통하는 쟁점이다. ‘역사전쟁’의 한복판에 서게 된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유적지 등을 22∼24일 찾았다. 당국의 무관심 속에 항일투쟁의 흔적들은 희미해지고 있었다.

임시정부 청사를 둘러보려면 ‘높으신 분들’ 얼굴부터 봐야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는 신톈디(新天地)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주소는 마당로 306롱 4호. 예전에는 ‘보경리 4호’로 불렸다. 신톈디는 서울로 치면 가로수길이나 강남역 사거리쯤 된다. 대형 쇼핑센터와 고급 커피숍, 술집 등이 밀집해 화려한 곳이다.

청사는 오전부터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주로 한국인 관광객이었다. 단체관광객부터 다정하게 손잡은 모녀까지 다양했다. 이곳에서 김구 주석이 백범일지 집필을 시작했고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기획됐다. 관람객들은 중국 내 여러 임시정부 청사 중 가장 긴 6년여간 항일투쟁의 근거지가 됐던 곳을 꼼꼼하게 살폈다.

관람에는 순서가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는 연립주택 형태로 12가구가 길게 늘어선 스쿠먼(石庫門) 구조다. 3층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1호부터 12호까지 늘어서 있다. 3∼5호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로 쓰고 있었다. 관람객은 먼저 3호로 들어가 임시정부 관련 영상물을 시청해야 한다. 입장료는 20위안이다. 모니터는 방 정면에 붙어 있다.

우측 벽은 국내 정치인과 고위 관료의 방문 사진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모니터 바로 옆 자리엔 김영삼∼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이 있다. 그 옆으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지사, 서병수 부산시장, 유승민·송호창·이자스민 의원 등의 사진 12장이 걸려 있다. 방산 비리에 연루된 최윤희 전 합참의장 사진도 있었다.

관람객들은 ‘짜증난다’는 반응이었다. 인천에서 가족여행을 온 50대 남성은 “왜 이 사람들(정치인) 사진을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여기 있어야 할 얼굴이 아니다”라고 했다. 대구에서 온 50대 남성은 “여기서도 저 얼굴들을 봐야 하나.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기에 이들 얼굴로 (관람을) 시작해야 하나”라며 “맥 빠진다. 국제적 웃음거리 아닌가”라고 말했다.

“항일운동의 ‘혼’은 빠져버렸다”

영상이 끝나면 3호를 나와 실제 임시정부 청사로 쓰인 4호로 안내된다. 가장 먼저 김구 주석의 흉상이 보이고 뒤쪽으로 태극기가 걸려 있다. 안쪽에는 주방과 화장실이 자리하고 있다. 가파른 좁은 계단을 올라 2층에 가면 집무실이 나오는데 김구 주석과 비서가 업무를 보는 마네킹이 전시돼 있다. 한층 더 올라가면 침대가 깨끗하게 정돈된 침실이다.

동행한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학자들은 지나치게 깔끔하게 단장된 모습에 실망스러워했다. 한 역사학자는 “바닥이며 천장, 벽은 물론이고 가구와 집기가 다 바뀌었다. 지나치게 깔끔해 독립운동의 영혼이 빠져버린 느낌”이라고 말했다. 다른 전문가도 “과거엔 올 때마다 ‘이분들이 참 힘들게 독립운동을 하셨구나’란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이 정도면 생활 여건이 좋았네’란 인상을 준다”고 했다. 실제로 한 여대생 관람객은 “와 좋다”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물론 이곳은 80, 90년대 유적지로 확인된 장소다. 따라서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의 흔적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학자들의 아쉬움은 당시 상황과 최대한 가까울수록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얘기다. 지저분하다고 밀어버리고 깔끔한 관광지로 탈바꿈시키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 방문(지난 9월 4일)을 앞두고 대대적 리모델링 작업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희미해지는 항일운동 흔적들

역사학자들은 중국 정부를 비난하기는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금싸라기 땅을 개발하지 않고 유적지로 보존하고 있어서다. 개발을 원하는 지역주민의 반발을 누르고 있는 점은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만약 가로수길 한가운데에 다른 나라 유적지가 있어서 개발을 못한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 후 뿔뿔이 흩어진다. 김구 주석은 난징(南京)시 화이칭챠오(淮淸橋) 다리 부근에서 처녀 뱃사공인 주아이바오(朱愛寶)와 동거하며 고물상 행세로 일본 군경의 눈을 피해 다녔다. 백범일지에도 언급된 이곳은 어디에도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얽혀 시끄러운 경적소리만 가득했다. 현지 가이드는 “다리 부근이라던데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국정 교과서에 담길 항일투쟁의 역사는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기술할 방침이다. 김구 주석의 발자취를 발굴하고 보존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의문이 드는 현장이었다.

전장(鎭江)시 임시정부 청사도 사정은 비슷했다. 전장시 임시정부는 일제가 난징을 점령한 뒤 임시정부가 옮겨간 곳으로 1935∼1937년 항일투쟁이 이뤄졌던 곳이다. 전장시 정부가 한 초등학교에 방치된 임시정부 터를 발굴해 2013년 5월 전시관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사료 부족’을 이유로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역사학자는 “다른 나라는 하나라도 더 찾아 보존하려고 혈안인데 우리는 드러난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상하이=글·사진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