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 25년 만에 가장 진일보… ‘사죄의 격’ 높여

입력 2015-12-28 21:54 수정 2015-12-29 00:27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이 28일 서울 세종로 외교부청사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외교장관회담을 마친 뒤 공동기자회견을 갖기 직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과 악수하고 있다. 두 사람은 양국 간 최대 외교 현안이던 위안부 문제 해결방안에 전격 합의했다. 이병주 기자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설립 이후 25년간 갈등을 빚어왔던 한·일 양국이 28일 극적인 합의안을 도출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그동안 일본 정부가 내놓았던 담화나 해법에 비해 가장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문제를 우회적으로 비켜가면서 후폭풍이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역사 수정주의 노선을 강화해 온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의 특성상 더 이상 강경한 자세를 취할 경우 판이 깨질 수밖에 없을 것을 우려해 정부가 이를 받아들였을 것으로 평가했다.

◇진일보한 일본의 사죄=한·일 양국은 위안부 문제의 해법으로 2012년 ‘사사에(佐佐江)안’을 기준으로 삼았다. 양국이 합의 직전까지 갔던, 사실상 유일한 실체적 해법이었기 때문이다. 사사에안은 일본 총리가 직접 사과 편지를 보내고, 일본 정부 예산으로 인도주의적 피해 보상을 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전제로 한 ‘인도적 조치’ 성격이다.

이날 도출된 합의안은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의 격(格)을 높이면서 사사에안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는 평가다. 무엇보다 별다른 수식어 없이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혀 책임 소재를 과거보다 명확히 지목하고 있다. 또 일본 총리의 개인 자격 사과 편지 대신 내각 총리대신의 자격으로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사과 표명을 한 것도 파격적이다.

가장 진일보한 언급이었던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의 담화에 비해서도 비교적 전향적이다. 고노 담화는 사실관계를 이번 합의안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기술했지만 정부 책임에 대해서는 “군의 관여 하에…” 등 간접적으로만 언급했다. 아베 내각이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밝힌 상태에서 정부 책임을 추가 인정한 것은 우리 정부의 집요한 추궁이 받아낸 성과로 평가된다.

◇우회적인 ‘법적 책임’ 논란=한·일 양국은 그동안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두고 치열한 수싸움을 벌여왔다. 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1인당 위자료 1억원의 손해배상 민사 조정 등 법적 절차를 진행해온 상황이다.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할 경우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할 것은 물론 세계적으로 일본의 만행이 공인받는 계기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힐 때마다 ‘군의 관여’ ‘정부의 도의적 책임’ 등 애매한 표현을 사용해 왔다. 법적 책임은 이미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일단락됐다는 입장이다. 반면 우리 정부는 반(反)인도적 범죄행위인 만큼 청구권협정과 달리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맞서 왔다.

결국 양측은 ‘법적’ 또는 ‘도의적’이라는 표현을 뺀 ‘정부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제3의 해법을 찾았다. 서로에게 해석의 여지를 주면서 외교적 입지를 넓힌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명시적인 표현을 외면하면서 법적 분쟁 소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번 합의가 정치·외교적 결단인 만큼 피해자의 개별 손해배상 소송은 지금까지처럼 양국 간 사법체계에 의해 다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도 이런 한계 탓에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는 우회적 ‘징벌’을 받는 수준에서 합의한 것이다.

◇배상금? 인도적 처사? 피해자 재단 성격은=우리 정부는 최대 10억엔(96억7000만원)의 일본 정부 예산을 받아 피해자 지원 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이 “정치적 야합”이라며 반발하고 있어 파장이 불가피하다. 또 일본 정부는 배상 성격임을 부인할 것이 뻔해 향후 치열한 신경전도 예상된다. 당장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은 기자회견 직후 “배상이 아닌 피해자의 명예와 존엄을 치유하기 위한 사업”이라며 해석을 달리했다. 일본 산업혁명 시설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처럼 한·일 간 ‘동상이몽’이 또 시작된 것이다.

재단의 성격과 사업도 미지수다. 지난 5일까지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는 사망자를 포함해 모두 238명이다. 일본으로부터 받기로 한 10억엔은 피해자 1인당 4000만원꼴로 나뉘는 만큼 개별 민사소송 청구금액보다 적다. 따라서 정부는 피해자의 명예 및 존엄성 회복을 위한 효율적인 지원방안을 마련해 이들을 설득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