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재현장에서 얼굴 곳곳 주름이 깊게 파인 노(老)소방관을 본 적이 있다. 검붉은 화염을 향해 고정된 그의 눈길은 비록 정열 가득한 젊은 소방관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힘에 부치는 노병의 것도 아니었다. 이는 수없는 담금질을 통해 단련된 명검의 칼날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리라.
사회 각 분야를 아울러 이상향 실현의 해법으로 으레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바로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말이다. 필자는 30년 넘게 소방공무원으로 봉직하며 아비규환의 재난현장에서 무수한 고민과 마주했다. 올해엔 무엇보다 ‘재난현장 황금시간 목표제’ 달성을 위한 다양한 정책 수립과 장비 확충 등 현장의 물리적 기반 구축에 온 힘을 기울였다.
지난 3월 서울 중구의 한 헬스클럽에서 50대 남성이 심정지로 쓰러져 소방펌프차와 구급차가 출동했다. 현장에 먼저 도착한 소방차에는 자동제세동기 등 응급장비가 갖춰져 있었고, 숙련된 진압대원들이 심폐소생술을 시행해 환자의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심정지는 골든타임이 약 4분. 구급대보다 2분 먼저 도착한 화재진압대의 활약으로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는 심정지 환자의 소생률을 높이기 위해 올해 서울시에서 도입한 ‘다중출동체계’ 덕분이다. 또 심폐소생술 교육을 확대한 결과 여러 시민영웅을 탄생시켰다. 지난 4월 강서구의 아파트 단지에 쓰러진 50대 남성이 한 초등학생의 심폐소생술로 살아난 사례는 두고두고 미담으로 회자됐다. 알려진 것처럼 이 학생은 사고 발생 4시간 전 인근 소방서에서 심폐소생술을 배웠다. 7월에는 송파구의 한 아파트에서 호흡이 멎은 아빠를 신속한 흉부 압박으로 살려낸 초등학생이 화제가 되었다. 이 학생 역시 학교에서 119구급대원으로부터 심폐소생술을 배운 경험이 있었는데, 특히 출동 중인 구급대원의 “흉부 압박을 멈추지 마라”는 지시에 따라 어머니와 교대로 가슴을 압박했던 게 주효했다.
오랜 기간 전국을 혼돈에 빠지게 했던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은 많은 고민을 하게 했다. 특히 환자들이 본인의 증상을 쉽게 노출시키지 않아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신고 접수단계에서부터 문진을 통해 환자 상태를 파악했고, 데이터가 출동대에 실시간으로 전달되면 현장대원도 보호장비를 철저히 갖추고 신고자를 접하는 등 잘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풀어나갔다. 그렇게 현장행정에 집중해 단 한 건의 감염확산 없이 메르스를 막아냈다.
10월에는 서울시가 자체적으로 도입한 ‘119소방대원 수학여행 동행’ 프로그램이 상주터널 폭발 사고 현장에서 준비된 기적을 연출했다. 터널 안에서 시너를 실은 트럭이 폭발했는데, 인근에 수학여행차 경주로 향하던 초등학생과 교사 70명이 탄 버스 두 대가 있었다. ‘제2의 세월호’를 떠오르게 하는 아찔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지킨 사람은 두 대의 버스에 타고 있던 소방관들이었다. 이들은 사고 발생 즉시, 학생들을 안정시키고 침착하게 터널 외부로 대피시켰다. 차량 10여대가 불에 타고, 2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낳은 큰 사고였지만, 학생들은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서울시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지난해 9월부터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교에 소방대원 동행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올해도 30개교에 지원했는데 출발 전 안전교육과 안전사고 발생 시 긴급구조 및 응급처치를 책임진다.
새해가 오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노소방관의 지혜와 통찰로 현장대응능력 강화에 더 힘을 쏟겠다. 더불어 덧없는 희생이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대책 마련에 늘 신경 쓸 것이다.
권순경 서울시 소방재난본부장
[기고-권순경] 안전은 현장에 답이 있다
입력 2015-12-28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