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 의료 선교사, 애니 엘러스] 재산·신앙, 가진 것 모두 조선인에 유산으로

입력 2015-12-28 18:20 수정 2015-12-28 20:57
한국 선교 초기 여성 사역의 개척자들로 불리는 하디 부인, 애니 엘러스, 에비슨 부인 등의 말년 모습(왼쪽부터)으로 사진은 1930년대 초반 촬영됐다. 이용민 박사 제공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번커 부부의 묘비 내용. 이용민 박사 제공
자기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저 멀리 떨어져 있었던 어떤 특별한 현장으로부터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낯선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한번 가보자! 그렇게 왔던 조선이었다.

이 현장으로부터의 목소리를 ‘현장 동력(Contextual power)’이라고 한다. 하나의 특정한 역사 또는 어떤 인물이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찾지 못할 경우에 적용시켜 볼 수 있는 명제이다. 애니 엘러스가 조선에서 보냈던 파란만장한 선교사로서의 삶을 납득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현장 동력은 조선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했다. 처음에 그녀는 조선인들이 나무와 돌을 숭배하는 것밖에 모르는 야만적이고 무지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선인들과 만나면서 그들이 지닌 고대 문명과 높은 수준의 문화, 그리고 다양한 예술적 재능에 대해 알게 되었고, 조선 사람들이 지닌 섬세함과 깊은 인격, 자존감에 겸손함까지 갖춘 모습을 발견했다. 엘러스는 자신이 지녔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매우 부끄러워했다. 그녀는 결국 조선인들을 존중하게 됐고, 누구보다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현장 동력을 통해 전해진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이 땅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새롭게 발견해 나갔던 그녀의 인생 역정 안에는 자신의 미래와 사명을 위해 스스로 설정한 수많은 계획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79년 일생 중 50년 동안 그녀는 갖고 있던 재산 모두를 바쳐 조선인들을 섬겼다.

그리고 소리 없이 이 땅에 잠들어 있다. 마지막회에서는 애니 엘러스가 남긴 실제적 유산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의 우리가 직접 보고 만지고, 확인할 수 있는 유산들이 너무 많다. 따라서 그녀가 남겨준 유산들의 목록을 일일이 점검하기보다는 그러한 유산들을 직접 찾아볼 수 있는 한 가지에 더욱 집중하고자 한다.



다양한 자료를 남기다

우선 그녀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글들이 있다. 엘러스가 남긴 대표적인 글들은 다음과 같다. ‘My First Visit to Her Majesty, The Queen’(The Korean Repository, 1895) ‘Personal Recollections of Early Days’(The Korea Methodist News Service, 1934) ‘Early Personal Recollections’(The Korea Mission Field, 1935. 4) ‘Early Memories of Seoul’(The Korea Mission Field, 1938. 2). 이 글들은 애니 엘러스가 조선에서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이 직접 기록한 기사이기 때문에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에 도착한 이후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의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들이 있다. 18편 정도의 편지들을 통해 그녀의 초기 선교 사역을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손으로 쓴 필기체이기에 읽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정신여자고등학교에서 이 편지들을 인쇄체로 발간했기 때문에 접근이 용이한 편이다. 정신여자고등학교 사료연구위원회가 출간한 ‘한국에 온 첫 여의료선교사 애니 엘러스’(2009) 등이 대표적이다.

그 다음으로 애니 엘러스와 남편 번커가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본부에 보낸 문서자료들이 있다. 여기에 들어있는 애니 엘러스의 편지들을 통해 기독교조선감리회 소속 선교사로서의 그녀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밖에 ‘정신백년사’ ‘이화 100년사’ ‘한국기독교의료사’ ‘한국간호역사자료집’ ‘배재학당사’ ‘대한기독교서회백년사’ ‘대한성서공회사’ ‘동대문교회백년사’ ‘용두동교회100년사’ ‘우이교회100년사’ ‘경신사’ ‘한국감리교 여선교회의 역사’ 등의 자료를 통해 그녀의 면면을 살필 수 있다. 문서 자료를 자세히 소개하는 이유는 그녀를 포함한 내한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들을 직접 찾아보기 위한 안내라고 할 수 있다. 또 필자가 아직 못 다한 말들을 대신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우리가 상속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애니 엘러스가 남겨준 유산들, 특히 그녀의 남편 번커와 함께 남겨준 한국 기독교 역사의 유산들은 오늘의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고 밀접한 것들이다. 그러다보니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그들의 유산이라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할 수가 있게 된다.

엘러스의 남편 번커는 원래 한국으로 올 계획이 없었던 사람이다. 처음에 헐버트 길모어와 함께 선발된 사람은 발렌틴(Valentine)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출발이 연기되는 동안 그의 마음이 바뀌었고, 그 대신 번커가 선발되었던 것이다.

요즘 많은 한국교회 신자들이 신앙 유산을 찾기 위해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방문한다. 그리고 묘원 한복판에 누운 번커 부부의 묘지와 묘비를 스쳐 지난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유산들을 찾기 위해서는 양화진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조선이라는 무대 위에서 조선인들이 애니 엘러스와 같은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의 교회, 조선의 학교, 조선의 병원 등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을 따라 오늘의 생생한 유산으로 흐르고 있는 자기 자신의 신앙 안에서 스스로 직접 찾아야 할 것이다. 마침 이들 부부에게는 자녀가 있었다는 보고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그들의 실질적인 유산을 상속받은 자녀들이지 않을까 싶다.

이용민 박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연구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