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전 경기도 광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 유희남(88) 할머니는 1층 거실에 앉아 TV 뉴스를 ‘듣고’ 있었다. 폐암 진단을 받고 항암제를 투여한 뒤로는 시력이 부쩍 떨어져 TV를 ‘보지’ 못한다. 유 할머니는 한·일 외교장관 회담 뉴스가 들리자 “부질없다.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만난 게 10번이 넘는다. 더 이상 일본 정부를 믿지 않는다. 우리 정부와 국회에서 진정한 사과를 받아주겠지 하는 믿음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장관 회담을 앞두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사과와 연내 해결 가능성에 많은 관심이 쏠렸지만 정작 피해 할머니들은 냉담했다.
유 할머니는 3주 전에 넘어져 수술을 받은 상태였다. 넓적다리에 철심을 6개나 박아 혼자선 거동도 어려웠지만 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과하기도 전에 소녀상 이전 얘기부터 나오는 것만 봐도 아베의 사과 메시지가 얼마나 진정성이 없는지 알 수 있다”며 “생존자 46명에게 10억원 기금으로 보상한다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옥선(88) 할머니는 나눔의 집 1층 자기 방으로 기자를 데려가더니 버선을 벗어 발의 상처를 보여줬다. “위안소에서 도망치다 붙잡힐 때 다친 상처”라며 1시간가량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 들려줬다. 이야기를 마친 할머니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이 진정한 사과를 하는 것이다. 배상은 진정한 사과를 하는 과정에서 따라오는 거다. 사죄에 진심이 전해지려면 아베 총리나 일왕처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3년 전 병원에서 심장병으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했다. 심장약 복용 후유증으로 시커멓게 변한 손을 들어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우리가 힘이 없어 미국에 가서 집회를 했는데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주먹질을 해봤자 변하지 않는다. 정부에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어본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눔의 집 안신권(54) 소장은 “여기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자 10명과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 없이는 인도적 차원의 지원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27일 밝혔다. 안 소장은 “전국 위안부 피해자 46명이 모두 동의하지 않는 한 일본의 해결방안을 수용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일본 언론이 보도한 ‘소녀상 이전’ 가능성에 대해서도 반발이 잇따랐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일본 언론이 말하는 대로 소녀상 철거가 거론되고 있다면 큰 문제”라며 “가해자가 문제의 역사를 제거하려는 폭력적 시도”라는 입장을 밝혔다.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27일 “소녀상 철거나 이전은 불가능하다. 일본 정부가 진정한 사과를 하고 싶다면 소녀상 앞에 나와 추모하는 것이 옳다. 동상을 철거하라면서 사과하는 게 어떻게 진정성 있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의 정대협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 살고 있는 김복동(89) 할머니도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사과해야 한다. 소녀상은 후손들이 아픈 역사를 배우도록 세운 것인데 왜 자꾸 없애라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등 ‘일본군 위안부연구회 설립 추진 모임’ 소속 교수 7명은 성명을 내고 “시간에 쫓겨 섣부른 결론을 내면 최악의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국가 차원에서 사죄·배상하고 역사교육과 추모사업, 책임자 처벌을 해야 비로소 일본의 책임이 종료된다”고 강조했다.
광주=홍석호 기자 wi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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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2-28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