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한승주] 걱정 말아요 그대

입력 2015-12-27 17:38

서울 도봉구 쌍문동 봉황당 골목길에는 배려와 관심이 넘친다. 그곳에서는 주인집 아들도, 그 집 지하에 세 들어 사는 딸도 빈부 격차로 인한 스스럼이 없다. 전교 1등과 전교 999등이 틈만 나면 함께 어울린다. 공부를 못한다고 얕잡아보지도 않고, 성적 때문에 주눅 들지도 않는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 아빠랑 둘이 산다고 불쌍해하지도 않는다. 그냥 다 동네친구다.

잘살고 못살고, 공부 잘하고 못하고, 엄마 아빠가 계시고 안 계시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고등학생인 아이들은 남이 갖고 있는 걸 크게 부러워하지도, 내가 못 가진 걸 창피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옆의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일처럼 울고 웃는다. 그 골목에서는 다들 오롯이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 부대끼며 즐거워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얘기다. 요즘 연말모임마다 빠지지 않는 화젯거리이기도 하다.

1988년에 고등학생이었던 내 또래는 물론이고,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한 세대까지 드라마에 열광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그 시절의 따뜻한 정서 때문이 아닐까.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진심 어린 걱정 말이다. 요즘은 이웃 간에 거의 사라진, 그래서 더 그립고 소중한 감정이다.

우리 삶은 그때와는 참 많이 달라졌다. 몇 년 전 아파트로 이사 오던 날, 바로 아래층에 사는 사람은 ‘뛰어 다니지 말아 달라’는 요지의 긴 편지를 내밀었다. 아직 이삿짐도 풀지 않았는데 새로 온 이웃에 대한 반가움보다는 층간소음을 걱정하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27년이 흐르는 동안 서울에 골목길은 거의 사라졌다. 그 자리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쏙 들어가는 풍경 속엔 이웃과 훈훈한 얘기를 나눌 여유가 없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겨우 알 뿐, 속사정까진 알 길이 없다. 골목이 아파트가 되고, 공동체 대신 개인주의가 들어앉은 풍경은 스산하다.

최근엔 인천에서 11세 어린이가 아버지에게 학대받다가 가스 배관을 타고 탈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아이가 학교도 못 가고, 2년 동안 아버지에게 맞고 굶주리는 동안 이웃들은, 우리 사회는 몰랐다. 학교는 장기결석 아동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아이는 이미 이사 간 후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 집에 아이가 있는지, 학교를 다니는지, 이사를 갔는지 왔는지도 몰랐다. 그 시절 쌍문동 골목에선 당연시되던 이웃 간의 관심과 걱정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그래도 희망은 다시 이웃과 사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추운 겨울, 앙상하게 마른 아이가 맨발로 허겁지겁 슈퍼마켓에 들어왔을 때, 슈퍼주인은 아이에게 빵을 주었다. 만약 아이에게 돈이 없다고 돌려보냈다면 아이는 돌아갈 곳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사연이 소개된 후 많은 이들이 공분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11세에 16㎏밖에 안 됐던 아이는 이제 살아갈 것이다. 사회의 관심이 아이를 살릴 것이다.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음악 ‘걱정 말아요 그대’는 우리에게 많은 위안을 준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고 노래한다. 한 해가 지나간다. 노랫말대로 아픈 기억들은 가슴에 깊이 묻어버리자. 지나간 일은 다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니. 2015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시절 골목길의 따뜻한 공동체, 상대방에 대한 배려, 진심 어린 걱정을 소환해봐야겠다.

한승주 산업부 부장대우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