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지 못한 남북의 가족들, 또 되풀이될 138일의 생방송… 임민욱 ‘만일의 약속전’

입력 2015-12-27 19:07
‘통일등고선’ 설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임민욱 작가.

198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생중계됐던 KBS의 남북이산가족 찾기. 138일에 걸쳐 진행됐던 생방송을 통해 1만 여명의 이산가족이 만났다. 영화 ‘국제시장’ 등에서 한국 현대사의 감동적 명장면으로 ‘소비’되고 있지만, 당시 가족을 찾겠다고 신청한 사람은 10만 명이 넘었다. 여전히 9만 여명이 헤어진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중견작가 임민욱(47)이 이런 안타까움을 전시장으로 끌고 왔다. 서울 중구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만일의 약속’전을 통해서다.

전시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입구(작품명 ‘시민의 문’)를 지나면서 지난해 광주비엔날레의 ‘문제적 작가’였던 그를 기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1950년 보도연맹사건으로 이승만정부에 의해 대량 학살됐던 희생자 유골이 담긴 컨테이너를 통째로 끌고 오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번 작품은 그에 비해서는 훨씬 시적이며 묘한 슬픔의 정조가 감돌기까지 한다.

전시장의 한 방에는 헤어진 가족 이름을 적은 종이를 들고 있는, 숱한 사람들의 방송 이미지가 돌아간다. 그런데 1983년 실제 방송보다 화면 속도가 느리다. 마치 재회를 희구하는 이산가족의 고통과 간절함을 좀 더 오래도록 지켜보자고 유도하는 것처럼.

이어지는 공간에서는 방송 촬영에 쓰이는 이동식 카메라, 조명 반사판 등을 형상화했다. ‘허공에의 질주’라는 제목을 단 설치 작품들은 ‘애니미즘적 상상력’이 빛난다. 바퀴가 달린 거대한 이동식 카메라의 몸체는 소나무다. 엉거주춤 서 있는 카메라맨은 반인반수이며 빛을 반사해야 할 반사판은 시커먼 색이라 오히려 빛을 흡수하게 생겼다. 바다의 부표와 우뭇가사리로 만든 카메라 장비의 끝에는 뿔이 달렸다. 미디어는 말 그대로 매개체다. 남과 북의 이산가족찾기에서 미디어는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원시시대 주술사처럼 실제로 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가슴 아프게 묻고 있는 것이다.

이 방으로 안내되는 중간에 관람객은 남과 북의 관계를 형상화한 작품을 지나치도록 동선이 연결되어 있다. ‘통일등고선’이라고 명명된 작품은 빙산을 연상시키는 길쭉한 계단식 조각품 양쪽에 각각 남과 북을 상징하는 조각이 케이크처럼 쳐 박혀 있다. 빙산은 녹고 있는 건지, 냉각되고 있는 건지 모호하다. 남과 북의 현실이 그렇다. 그래서 작가는 주술적인 힘을 빌어서라도 ‘더 늦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비전향장기수를 정신과 의사가 인터뷰하는 영상 등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전시다.

작가는 이화여대 서양화과에서 수학하고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조형예술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하교 조형예술과 교수로 있다. 2월 14일까지. 일반 3000원, 학생 2000원(1577-7595).손영옥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