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흑암 속에 빛으로 오시는 예수

입력 2015-12-25 19:44

올해 겨울은 그 어느 해보다 따뜻하다. 하지만 마음은 그 어느 해보다 춥다.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과 테러의 소식이 들려온다. 수많은 난민이 살길을 찾아 방황하고 있다. 유럽 선진국들은 자신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난민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민중총궐기에서 볼 수 있듯 다양한 계층에서 아픔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미래의 주역인 청년들은 미래가 불투명해 스스로 ‘포기세대’라 자조하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현실, 미래가 불투명한 암울한 현실이 오늘 우리들의 현주소다.

이런 가운데 성탄절을 맞이했다. 성탄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낙타를 타고 별을 찾아가는 동방박사들이나 짐승들이 있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성탄절은 온통 예수님의 탄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그분이 왜,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예수님의 부드럽고 온화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는 있어도 진정 그분이 왜 오셨는지에 대한 질문은 없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의 사역에 관심을 두고, 그가 걸어간 길에 주목하고 있다. 예수님이 태어난 어두운 시대는 그의 사역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셨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에 달리셨다.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 이전에 갈릴리의 아픔을 드러내고 있다. 마태복음 4장 15절에서 ‘이방의 갈릴리’라고 한탄했던 이사야의 말씀(사 9:1)을 인용해 전하고 있다.

갈릴리는 왜 이방의 갈릴리가 되었는가. 두로 왕 히람이 솔로몬의 성전을 짓는 데 백향목과 잣나무와 금 등의 자재를 공급해준 대가로 갈릴리를 차지했다(왕상 9:11). 그 후 이곳은 강대국의 먹이가 됐다. 강대국들은 이 지역에 백성을 이주해 살게 했고 갈릴리 주민들은 그들의 소작농에 불과했다. 마태는 그래서 아픔과 고통이 극심한 그곳을 가리켜 이방의 갈릴리라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었고, 사망과 그늘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지가 왜 갈릴리인가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사망과 흑암의 자리에 있는 이들을 기억하며 거기에서부터 주님의 탄생을 이야기해야 한다. 바로 그곳이 주님이 오실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땅에 사망과 흑암이 지배하는 곳은 어딜까. 팽목항은 아닐까. 지금도 물속에 가라앉은 배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광명조차 어두움으로 보이는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의 마음이 그 자리가 아닐까.

추운 겨울에 동거차도의 산에 올라 천막을 치고 세월호 참사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 유족들의 텐트, 저 진도의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 물길인 맹골수도에 가라앉은 세월호 속에 그 마음과 삶 전체가 붙들려 움직일 수 없는 바로 그 자리가 베들레헴의 마구간이 아닐까.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빛이 비추이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쳤듯이 이번 성탄절을 통해 흑암에서 사망의 고통을 경험하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희망의 빛으로 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나핵집 열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