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가볍게, 저녁은 무겁게. 로푸드(Raw Food) 식단으로 생활하는 김민정(30·여)씨의 식습관이다. 아침식사는 케일, 시금치 등 녹색 잎채소를 과일과 함께 갈아 만든 스무디로 시작한다. 채소 특유의 쌉싸래한 맛을 줄이고 싶으면 레몬즙을 살짝 넣는다.
점심식사는 각종 채소를 곁들인 샐러드다. 드레싱으로 아보카도나 레몬즙, 발사믹 식초 등을 곁들여 맛을 낸다. 양이 부족하다 싶으면 견과류나 곡물 빵을 먹기도 한다. 저녁식사엔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먹는다. 그렇다고 돼지고기 같은 육류를 고르지는 않는다. 현미밥에 나물 반찬이나 로푸드 재료로 만든 피자 스파게티 등을 먹는다. 불을 사용하지 않고도 피자와 스파게티 요리는 손쉽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로푸드’로 되찾은 건강
김씨는 5년 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를 다쳐 바깥 생활을 못하다 보니 점점 살이 쪘다. 피부도 급격히 나빠졌다. 병원을 다니며 약을 처방받아 먹었지만 쉽게 낫지 않았다. 운동을 하기 어려운 상태라 식단을 바꿔보기로 했다. 시작은 채식이었다.
3개월 만에 몸에 변화가 찾아왔다. 피부 트러블이 사라지고 몸무게도 예전으로 돌아왔다. 몸으로 체험한 그는 본격적으로 로푸드 음식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미국을 찾았다. 로푸드 식단의 영양학적 의미, 채소를 맛있게 먹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지난 21일 만난 김씨는 “채소에 단백질이 없다는 건 잘못된 상식이다. 궁합이 맞는 재료를 균형 있게 고르면 건강한 로푸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임신 4개월인 김씨는 로푸드 식단과 일반식을 병행하고 있다. 임신 전과 비교해 식단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입덧 때문에 시금치 등 못 먹는 재료가 생겼지만 오히려 먹는 양은 더 늘었다. 그는 “임신한 뒤로는 되레 단순하게 먹게 됐다. 디저트가 먹고 싶을 땐 견과류를 넣은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불을 쓰지 않는 로푸드 음식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건 생(生)채식이다. 하지만 견과류와 각종 과일로 아이스크림, 브라우니, 초콜릿 등을 만들 수 있다. 열을 가하지 않고 건조기를 이용해 재료를 굳히는 방식이다. 브라우니는 물에 불린 호두를 곶감과 함께 갈아 반죽을 굳히면 간단하게 완성할 수 있다. 초콜릿은 카카오가루와 코코넛 버터 등을 섞어 만든다.
김씨는 짬짬이 로푸드를 만드는 방법 등을 집에서 가르친다. 최근 2년 새 수강생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블로그를 보고 연락을 해오는 몇 명을 대상으로 작은 모임을 가졌다. 그러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정기적으로 수업을 하게 됐다. 김씨는 “헬스 트레이너, 한의사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수업 신청을 하고 있다”며 “호기심에 수업을 신청했다가 로푸드 요리를 하는 재미에 빠지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밀가루·설탕 없이 만드는 디저트
이윤서(30·여)·강대웅(34)씨 부부는 ‘건강한 식단’을 나누기 위해 직접 카페를 차렸다. ‘뿌리 온 더 플레이트’라는 이름의 디저트 가게를 시작한 지 2년이 훌쩍 지났다. 카페의 모든 음식에는 설탕과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에다 유기농 채소와 유전자를 변형하지 않은 콩, 공정무역으로 산 견과류 등을 사용한다. 메이플 시럽은 설탕보다 10배가량 비싸고, 공정무역 캐슈넛은 일반 캐슈넛보다 2∼3배 비싸다. 그런데도 ‘건강한 재료’를 고집한다. 집에서 먹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음식을 장만하려는 노력도 곁들인다.
두 사람은 결혼 전부터 각자 채식을 하고 있었다. 만성 건선에 시달리던 이씨는 5년 전 채식을 결심했다. 어느 날부터 스테로이드 연고를 발라도 나아지지 않는 데다 피부가 차츰 약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식단을 현미와 채소로 바꾸면서 연고를 바르는 치료법은 그만뒀다. 식단을 바꾸고 난 뒤부터 스트레스가 줄었다. 이씨는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 몸에 계속 독이 쌓인다. 몸이 무거워지면 별일 아닌데도 예민해지고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식단을 바꾸면서 몸이 한층 가벼워졌다”고 말했다. 화장기 없는 이씨의 얼굴은 깨끗하고 맑았다.
남편 강씨는 채식을 한 지 15년이 넘은 베테랑이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속이 불편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채식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식단이었고, 전문식당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집에서 채소를 재료로 한 요리를 자주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실력도 늘었다. 사찰음식 만드는 법은 따로 배웠다. 맛에 대한 감각이 있어서인지 카페에서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 팔기 전에는 꼭 강씨가 평가를 한다.
이 카페의 대표 메뉴는 ‘뿌리채소밭 피자’와 ‘현미 초코 케이크’다. 언뜻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재료를 따져보면 사뭇 다르다. 피자는 현미 도우 위에 각종 채소를 올려 맛과 식감을 동시에 살렸다. 현미 초코 케이크에는 유기농 카카오가루와 메이플 시럽을 넣어 은은하게 단맛이 나도록 했다. 차츰 인기를 끌면서 ‘맛집’으로 꼽히기도 했다. 부부는 밀가루와 설탕을 빼고 채소로 음식을 만들면 맛이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셀리악병(몸 안에 글루텐을 소화하는 효소가 없어 생기는 질환)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하는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이 카페를 찾는다. 이런 손님들을 위해 부부는 좋은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조리법 개발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여러 가지 맛을 내기 위해 색다른 방법을 고민한다. 케이크에 생크림을 바르지 않고 저민 사과를 넣는 식으로 다양한 시도를 한다. 보리, 조, 치커리 등으로 카페인이 없는 ‘곡물커피’를 만들기도 했다.
이씨는 “만드는 사람의 입맛에 맞아야 팔 수 있다는 생각에 항상 연구한다. 원래 있던 메뉴도 조리법을 바꿔보고,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기 위해 고민한다”고 했다. 부부는 안 좋은 재료를 쓰거나 가격을 올리는 방법으로 타협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본인이 먹을 음식이라는 생각으로 좋은 재료를 고민하고 정성을 다한다.
밀가루 없는 중국음식
중식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박영우(34) 대표의 주방에는 밀가루가 없다. 박 대표는 ‘밀가루 없는 중국음식’을 해보고 싶었다. 면과 튀김이 많은 중국음식은 밀가루를 많이 써야 한다. 그 바람에 먹고 나면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 안 되기도 한다. 그는 중국음식에 대한 이런 편견을 깨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밀가루를 쓰지 않는 중국음식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4월 서울 용산구에 중식 레스토랑 ‘JARI(자리)’를 열었다. 밀가루를 쓰지 않는 ‘글루텐 프리’ 레스토랑이다.
밀가루 없는 짬뽕은 어떤 모습일까. 이 집의 대표 메뉴인 ‘JARI’S 짬뽕’은 3㎜ 굵기의 쌀국수 면을 쓴다. 박 대표는 쌀국수 면이 밀가루 면만큼 쫄깃하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의외로 손님들 반응이 좋았다. 자연 재료를 쓴 깊은 국물 맛에 소화가 잘 되는 쌀국수 면은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탕수육과 칠리새우를 튀길 때도 밀가루를 섞지 않고 감자전분만을 사용한다. 느끼함은 줄고 담백함이 더해진다. 밀가루 없는 짜장면은 아직 개발 중이다. 박 대표는 “쌀국수 면으로 시도해봤는데 짜장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며 “언젠가 글루텐 프리 짜장면도 꼭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자극적이지 않다보니 처음 문을 열었을 때엔 손님이 많지 않았다. 박 대표는 ‘글루텐 프리’라고 별다르게 홍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석 달 정도 지나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밀가루를 쓰지 않아 많이 먹어도 부담이 없는 중식당이라는 호평이 이어졌다. 지금은 하루 평균 100여명이 찾는다.
점심식사 시간에 이곳을 찾은 김미희(33·여)씨는 “아무래도 살이 덜 찌는 기분이 들고 소화도 잘 된다”고 했다. 또 다른 손님 김모(27)씨는 “처음엔 조금 밋밋했는데 먹고 나니 뒷맛이 깔끔하다. 많이 먹었는데도 부담이 없다”고 말했다.
심희정 김판 기자 simcity@kmib.co.kr
[밥상혁명 이끄는 뉴밀족] 밀가루·설탕서 해방된 끼니… 몸도 마음도 ‘프리’
입력 2015-12-26 04:00 수정 2015-12-28 15:07